어디서 색이 접히는가  

Where Hue Is Folded


천미진 

Chun Mi-Jin


2026 / 06 / 18 - 2026 / 07 / 25

 

어디서 색이 접히는가

Where Hue Is Folded


라흰 조은영 큐레이터


Ⅰ. 색채의 공간적 전환과 ‘접힘’

미술의 역사에서 색이 생기를 불어넣고, 장면의 분위기와 물질감을 조율하는 요소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색은 (특히 마티스나 로스코를 위시한 이들의 실험에 힘입어) 재현의 보조 수단이라는 한정된 역할에 머물지 않고, 화면의 균형을 조율하거나 색면의 진동으로 관객의 심상을 포섭하는 등 독자적인 조형 언어로 전면화되기 시작했다. 이제 색은 화면의 깊이와 리듬을 구축함으로써 주체의 지각 방식을 재편하는 조형적 추동력이라 할 수 있는 셈이다. 이처럼 감각과 구조를 조직하는 기제로서 색은 그간 풍부한 논의들을 도출해왔는데, 천미진 작가의 이번 개인전 《어디서 색이 접히는가》는 이를 오늘의 물질과 구조, 그리고 공간의 조건으로 옮겨와 새롭게 환기한다는 점에서 종래의 미학적 지평을 넓힌다.


천미진의 작업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그가 다루는 색이 2차원의 지지체 위에 정적인 상태로 안착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선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작업에서 재료와 구조를 통과하는 색들은 서로 중첩되고 스며든 끝에 고유한 깊이와 방향성을 획득하고, 마침내는 평면과 공간 사이의 어떠한 변곡점에 도달하는 까닭이다. 작가는 이렇게 서로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유동하던 색채가 일시적으로 고정되는 순간을 이른바 ‘접힘’의 방식으로 조형화하여, 정지된 듯한 표면 너머에 잔류하는 색채의 흐름과 역동성을 가시화하고자 한다. 이때 천미진이 화두로 삼는 ‘접힘’은 표면의 굴곡이 아니라, 평면을 넘어선 색이 밀도와 거리의 감각으로 조형의 입체적 관계를 활성화하는 ‘상태의 전환’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이는 형상이 구부러지는 사건이라기보다, 색이 표면을 초월하여 공간의 차원으로 감지되기 시작하는 찰나를 가리킨다.


천미진의 작업에서 색이 이렇듯 평면을 탈피해 깊이와 방향을 획득하는 것은, 색을 작가의 통제 아래 놓인 결과물이 아닌 재료와 조건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호 교섭의 관계로 바라본 결과다. 가령 그의 작품에서 색들은 투명한 층을 통과하며 위아래로 밀리거나 겹치고, 때로는 충돌하듯 맞부딪힌다. 색들의 이 같은 관계는 특정 조건 아래에서 하나의 조형적 상태에 이르기도 하지만, 이것이 불변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표면에 남은 색의 배열과 농도, 미묘한 번짐이 움직임의 흔적을 지닌 채, 색이 축적해온 시간의 결을 여전히 진동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디서 색이 접히는가》가 주시하는 것은 화면에 구현된 결과물이 아니라, 색이 하나의 상태로 응고되기 직전의 긴장과, 굳어진 이후에도 표면에 일렁이는 운동성의 흔적이다. 본 전시는 바로 그러한 역동의 지점에서, 색이 어떻게 외피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공간성’이라는 미지에 스스로 참여하는지를 묻는다.


Ⅱ. 조건으로서의 구조, 과정으로서의 형태

한편 ‘접힘’에 관한 천미진의 관심은 그것의 외형적인 조형성에 기인하기보다, 표면이 구조와 공간으로 전환되는 방식에 대한 그의 오랜 탐구에서 비롯되었다. 표면을 이렇게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해 나가는 작가의 시각은 무엇보다 독일에서 건축을 전공하며 실무를 쌓은 경험에 근간을 둔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구조와 균형, 연결과 변형의 문제를 궁구했을 뿐만 아니라, 구조를 형상을 지탱하는 골격이 아니라 요소 간의 관계를 조직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파악하게 된 까닭이다. 이는 작가의 관심이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가변하는 상태의 ‘과정’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와 같은 문제의식은 기실 천미진의 조형 언어 전반을 관통해 왔는바, 특히 2024년 밀라노에서 발표한 전시 《Morphorama》는 표면을 구조화하고, 그 구조를 통해 공간적 관계를 조직하려는 작가의 관심이 실제 공간에서 가시화된 예라고 하겠다. 독일 유학 시절 구상한 아이디어와 3D 프린팅 프로토타입을 설계에 적용하며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조형적 형태와 구조적 운동성을 명확히 보여주는 설치물로 구현된 바 있다. 이번 전시는 바로 그러한 실험의 토대 위에서 전개된다. 다만 작가의 전작(前作)이 구조 자체의 역동성과 균형에 무게를 두었던 것과 달리, 이번 개인전은 이러한 구조적 감각에 회화성과 색채의 논리를 결합함으로써, 그의 조형 언어를 평면 너머의 실제적 지각으로 확장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매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이 같은 조형적 확장은 천미진이 경험해온 ‘중간적 위치’의 감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미술과 건축,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해 온 행보에서 비롯된 것일까, 작가는 어느 하나의 범주에 자신을 귀속하기보다, 서로 다른 조건들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유동적 관계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그러한 정황은 개인사적인 맥락을 넘어, 천미진이 경계면에서 발생하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상호작용에 주목하게 된 동인이기도 했다. 작가의 작업에서 회화와 설치, 평면과 공간, 색과 구조가 독자적인 형식으로 정형화되지 않고 상호작용하며 시각적 긴장을 자아내는 것은, 경계면에서 끓고 있는 동적인 변화를 포괄하고자 한 오랜 탐구의 산물이다.

 

Ⅲ. 평면에서 실제 공간으로, 매체별 물질적 전개

천미진이 이상과 같은 미학적 토대 위에서 선보이는 회화와 조형물, 설치 작업들은 색과 구조의 관계가 평면을 넘어 움직임과 공간의 문제로 확장되는 추이를 각기 다른 물리적 조건을 통해 전개해 보인다. 그중에서도 천미진의 회화는 색과 레이어의 관계가 가장 밀도 있게 응축된 지대이자, 끊임없이 이어지는 색의 움직임이 화면에 잠시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조형적 지표다. 작가는 색을 미리 혼합하는 것이 아니라, 원색들이 각자의 물성을 유지한 채 서로 조우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모색 끝에 화면에 남겨진 조건과 물질의 ‘잠정적 상태’는, 관객으로 하여금 색채가 현재의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거쳐 온 역동적인 시간의 궤적을 직시하게 한다. 


아울러 평면에서 발현된 이행과 생성의 감각은 조형물과 설치를 매개로 삼아 마침내 실제 공간으로 확장된다. 특히 이번 전시의 설치 작업들은 수평에서 수직으로, 다시 수직에서 수평으로 전환되는 구조를 골자로 하는데, 이렇게 삼차원에 들어선 구조체는 평면 작업을 지지하는 배경을 넘어, 색채와 선형이 관객의 위치에 따라 여러 방향에서 촘촘히 읽히도록 만든다. 각 구조물의 앞뒤로 연결된 서로 다른 회화적 장면들이 관객의 이동에 맞춰 색의 순서나 전후 관계를 끊임없이 재배열하고, 그와 같은 파장 아래에서 색은 구조의 전환을 타고 방향을 얻어 공간 전체의 감각적 무늬를 조율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미진에게 설치 작업은 회화와 분리된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회화의 공간적 잠재력을 점화하는 매개에 가깝다.


한편 재료에 대한 천미진의 태도는 이상과 같은 매체적 전개를 가능케 하는 내적 기반이다. 그의 작업에서 재료는 기성의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색과 구조의 관계를 조직하는 근본적인 조건으로 기능한다. 재료가 지닌 투명성과 밀도, 표면감이 색채의 접속과 분리가 자아내는 특유의 양상에 힘입어, 화면 내에 깊이와 거리의 감각을 촉발하는 주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동일한 색조차도 막의 성질이나 인접색과의 간격에 따라 시시각각 변주하는 시각적 뉘앙스를 자아내게 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천미진이 구현하는 감각이 재료 위에 단순히 덧입혀지는 효과가 아니라, 물질과 시간 등 우연한 변수들이 서로 얽히는 맥락으로부터 발생함을 가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천미진이 운용하는 색이란 작가의 의도대로 귀착되는 결과물이 아니라, 재료와 조건의 우발적인 조응으로 빚어지는 잠정적 상태, 곧 색과 재료와 구조가 매 순간 균형을 찾아가는 여정이라 하여도 지나침이 없겠다. 


Ⅳ. 공간적 조건과 지각의 다층성

라흰갤러리의 공간은 천미진의 이러한 작업의 성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현시하는 장이다. 복층 구조와 계단, 상하로 교차하는 시점 등이 이번 기획에서 단순한 전시 조건이 아니라, 작업의 지각 방식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기능한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컨대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 전시장 곳곳을 가로지르는 시선의 고저차와 보행의 변화에 따라, 관객은 작품이 내포하고 있던 면과 색의 가변적인 관계, 이로부터 파생되는 시각적 징후들을 선명히 마주하게 된다. 특히 지하와 1층을 잇는 보이드 중앙의 대형 설치물은 양 층에 나뉘어 배치된 회화와 조형물을 유기적으로 매개하며, 각 작업 사이를 연결하는 움직임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 축의 주변을 맴돌며 동선을 확장해 나가는 경험으로 인해, 관람은 기정화된 형식을 수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시점의 변화에 따라 색과 구조가 실시간으로 재구성되는 생성적인 지각 과정으로 전환된다.


《어디서 색이 접히는가》는 이처럼 공간과 신체의 상호작용을 포용함으로써, 천미진이 그간 전개해 온 작업의 연장선 위에서 분명한 도약의 국면을 이룬다. 전시는 특히 표면 위의 색이 구조와 결합해 입체적인 깊이와 운동성을 얻는 양상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색과 구조, 신체의 동선이 하나의 유기적인 언어로 맞물림에 따라, 회화와 조형물이 고정된 오브제의 차원을 넘어 실제 공간으로 확장되고, 정지했던 장면에 시각적 파동을 일으키는 까닭이다. 전시 《어디서 색이 접히는가》는 색이 구조를 만나 공간의 지평으로 확장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조형적 조건과 (이를 경험하는) 능동적 지각 사이의 긴밀한 교차를 통해 고동하는 감각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