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토스와 상상의 조우 

The Encounter of Nostos and Imagination

나혜원 / 서원미 / 손승범 / 캐스퍼강

Na Hye Won / Seo Won Mi / Son Seung Beom / Casper Kang 


2022 / 01 / 18 - 2022 / 03 / 05

노스토스와 상상의 조우

라흰갤러리 큐레이터 조은영



필사의 인간이 지닌 본능적인 욕망이란 틀림없이 존재의 불멸일테다. 그런데 유구한 귀향의 노래인 『오뒷세이아』는 이와 같은 정형을 벗어난 새로운 페이지를 기록하고 있다. 주인공인 오뒷세우스가 영생을 약속하는 여신 칼륍소의 품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다음과 같이 비장한 결의를 천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집에 돌아가서 귀향의 날을 보기를 날마다 원하고 바란다오.” 1) 호메로스는 오뒷세우스가 그의 본연의 뿌리로 돌아가는 이 방대한 여정을 ‘노스토스 (nostos)’라 칭하고 있다. 노스토스는 돌아감과 되찾음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부재로 인한 상실에서 오는 아픔인) 노스탤지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중요한 사실은 귀환의 방향이 진실된 삶과 자의식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2) 말하자면 노스토스는 ‘본질로서의 과거’라는 차원에 밀착해 있다. 귀향을 다루는 영화나 소설에서 고향을 안락한 휴식처, 또는 감추어진 내면과 욕망이 흩뿌려진 곳으로 자주 묘사하듯이, 노스토스의 목적지는 곧 자아의 거울과도 같다.

 

하지만 망각의 물살이 밀려오는 한, 노스토스가 닿으려 하는 곳에는 빈틈이 생기기 십상이다. 그러면 갈망의 구심력이 오히려 미래를 향하게 되는데, 현재로서는 아직 성취되지 못한 것을 그리려 할 때 바로 상상력이 발휘된다. 그러한 맥락에서 예술가가 내면으로 침잠하여 관찰한 세계를 예술 행위를 통해 드러내면서도, 현실로부터 초연한 '또 하나의 실재'를 창조해야 한다는 사실은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예술은 고귀한 감정을 발하는 노스토스와, 회귀의 감정에 갇혀서는 안 될 상상력 사이에서 변증법적인 움직임으로 배태되기 때문이다.

 

지나가버린 대상의 빈자리를 채우기를 희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몽상적인 관조에 빠져드는 이 분열된 기대는 기실 예술의 무한한 동력이 되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네 명의 작가들과 함께 이와 같은 변증 관계에 놓인 사유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예술가의 노스토스가 이르는 곳에는 무엇이 망각의 강 저편으로 묻히려 하며, 그가 되찾으려는 시간과 감정, 관습의 유산과 상실 등은 어떻게 무늬를 만들어내면서 내면의 정신을 적시는지, 이로부터 작가는 어떠한 상상의 꿈을 유포하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 수백 가지의 표정 - 나혜원

 

나혜원 작가는 지나가버린 ‘정서적 교류’를 더듬기 위해 그와 주변인들의 초상을 그린다. 그런데 그가 기억의 방아쇠를 당겨가며 표현한 결과물은 자화상과 초상화임에도 추상에 가깝다. 이는 작가의 시선으로 포착된 낱낱의 순간이 얼굴이 아니라 순간의 상태와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부터 오랜 타지 생활과 이사 등을 겪었던 작가가 대상과의 감각적인 교류로 얻은 친밀감과 유대감, 상호작용을 탐구하게 된 것은 당연에 가까운 수순일 것이다. 더욱이 시간과 물리적인 거리를 극복하여 탄생한 작업들에는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 작가가 경험한 감정의 물결이 순수하게 드러나고 있다.

 

나혜원의 작품이 이처럼 허공에 머무르는 감정의 변주까지도 반영할 수 있었던 일차적인 까닭은 그의 회화가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듯 수백 가지의 표정을 기록한 ‘일지’와도 같다는 사실에 있다. 과연 그는 ‘일상을 기록하는 관찰자’로 자신을 정의한다. 작가는 그를 둘러싼 사적인 영역에서 작업의 동기를 발견하며, 그것을 매개로 세상과 연결되기를 꿈꾸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찰나의 기록에 가장 적합한 방식과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거대 담론보다 앞서는 소소한 일상의 비약을 마련한다. 가령 묘사할 대상이 정해지기만 하면, 그것을 향한 집중력이 흐려지기 전에 거침없이 작업을 진행하는 식이다. 스케치 없이 구도나 색을 계산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나혜원의 작업은 불완전함에서 싹트는 운동성과 시간성, 리듬감을 추구하는데, 즉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종이에 색연필, 볼펜, 수채화 등의 매체는 그러한 이유에서 대단히 적합하다. 또한 붓 없이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마치 춤을 추듯 그려낼 때면, 작가의 동요하는 심리가 더욱 절정으로 치닫기도 한다. 일상이 무심히 잊히기 쉬운 사회에서, 나혜원의 이 일기와 같은 작업은 마음의 집합체가 되어 화폭에 숨결을 가득 불어 넣는다.


# 원색적 유희와 정경 사이에 드리운 나의 그림자 - 서원미

 

서원미 작가가 묘사한 탈을 쓴 캐릭터들은 급류를 타듯 시야로 덤벼들며 관객을 황홀한 몰입감으로 이끈다. 작품은 언뜻 작가 자신의 내면의 심연인 듯하면서도, 현실과 동떨어진 무대 같기도 하다. 그러나 서원미의 작품 세계는 ‘회화의 전통적인 형식’을 탐구하겠다는 목표를 겨냥하여 근원에서부터 건설된, 지적인 욕망의 표상이다. 특별히 본 전시에서 선보이는 그의 작업들은 <카니발 헤드 Carnival head> 연작에 속한다. 사육제 (謝肉祭)를 뜻하는 카니발은 참회의 사순절을 앞두고 춤과 노래, 가장무도회를 벌이는 ‘한바탕 난장 축제’이다. 3) 작가는 이와 같은 축제의 개념에 착안하여 전시 공간을 연극 무대처럼 연출했다. 가면을 쓴 인물과 동화적인 캐릭터들은 물론, 평면적인 조형 요소와 공간의 깊이가 좁은 화면 구성이 하나의 세트장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원색적인 정경을 뜯어볼수록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전술하였듯 회화의 형식을 실험하고자 나름의 규칙을 설정하였던 서원미 자신의 그림자이다.

 

서원미의 노선은 그가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마련되었다. 가령 그는 첫 프로젝트인 <페이싱 Facing>에서 만고불변한 고전적인 형식을 천착했고, 뒤이은 <블랙 커튼 The Black Curtain> 연작에서는 색채를 최소화한 채 구성과 오일 물감 특유의 물질성을 실험했다. 이와 같은 두 연작들이 죽음과 역사를 소재로 했던 탓에 실험의 한계를 노정했다면, 색채에 온전히 집중한 <카니발 헤드>는 전연 새로운 막을 연다. 형식에 있어 일체의 제약도 없는 바탕 위에서, 작가는 각각의 존재감을 발하는 색채를 폭죽처럼 터뜨리는 것이다. 요컨대 <카니발 헤드>는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갖가지 재료가 충돌하며 색채를 번쩍이는 그림’ 자체에 관한 이야기이며, 유희적인 형상들은 이 이야기가 캐릭터화된 대상이다. 화폭에 칠해지기를 기다리는 ‘색의 상태’가 표현된 작업, <물감들> 시리즈는 그러한 맥락에서 작가 자신의 욕구의 발현이다. 이처럼 <카니발 헤드>를 위한 무대의 암전이 밝게 전환되는 이 순간, 페인팅을 향한 서원미의 욕구는 실루엣이 되어 화폭에 짙게 새겨진다.

 

# 폐허의 상흔으로부터 희망을 품는 것 – 손승범

 

지상의 모든 것은 끝없는 유전 (流轉)의 소산으로, 세월의 녹이 슬기 마련이다. 손승범 작가는 이처럼 먼 유전의 세월 끝에 굳은살이 깊게 박인 존재들을 조명한다. 밟히고 깨지며 풍상을 겪어보지 않은 삶에는 역사가 없기에, 그의 작업은 바스러지는 정물일지라도 그것이 지녔던 흩어진 정수 (精髓)를 모아 보는 데에 의미를 둔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그는 버려지고 소외된 물질들을 평면과 설치 작업으로 시각화하고 있다. 가령 이름 모를 잡초를 묘사한 회화 작업에서, 작가는 이 끈덕진 생명력을 마치 춤을 추는 듯한 꿈틀거림으로 재현했다. 또한 그가 재개발 지역에서 수집해 온 고물들은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입체 작품을 이루는데, 이 광경은 탑이나 제단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손승범의 ‘소외된 것들’은 쓸쓸한 감회나 세월의 무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작업에는 오히려 존재의 역사를 대하는 예의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생장한 잡초의 형상은 설치 작업에서 물건들이 쌓아 올려진 모양과 유사한데, 이와 같은 구성은 생명력의 숨결을 놓지 않는 이 존재들의 의미를 반추하고 하나의 기념비를 세우기 위한 작가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덧붙이자면 작가는 특정한 재료와 매체를 활용함으로써, 폐물의 꼬리표가 붙은 대상으로부터 ‘쓰임’의 유전자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먹과 과슈, 호분이 혼합된 손승범의 회화는 대표적인 예이다. 작가는 붓질을 좌우로 반복하면서 가로줄을 층층이 얹는데, 이는 소멸해 가는 대상의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포착해낸다. 또한 그는 오래된 목가구를 의도적으로 작업에 동원한다. 길거리에 흔하게 내버려진 목가구에는 지나온 시대상이 묵직하게 고여있기 때문이다. 손승범의 작업은 이처럼 귀중한 가치를 상실해가는 세태를 들추면서도, 삶을 되돌아보기를 바라는 희망을 묵묵하게 키우고 있다. 그러나 풍화를 거듭하며 생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고요 속을 튀어 오르며 경종을 울리는 이 버려진 것들의 목소리는 긴 여운을 남긴다.

 

# 미지의 무 (無)를 향해 이지러지는 별 – 캐스퍼 강

 

보이느니 난무하는 빛의 파편이요, 들리느니 한없이 진동하는 공명이다. 캐스퍼 강의 작업은 불가해한 세계에 잔류하는 별들의 시간과 빛깔을 한지에 담는다. 기염을 토하며 부딪쳐 오는 유성과, 남겨진 연소의 흔적을 물결처럼 흘리는 것이다. 이렇듯 작가가 표현해낸 별들의 명멸은 완전하게 추상의 영역에 있다. 캐나다에서 나고 자란 그는 한국 고유의 민화에서 형식을 탐구한 작업들을 선보이던 가운데, 2017년부터 이와 같은 추상 회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지는 민화의 토대가 되는 매체이므로, 《노스토스》에 전시된 그의 추상화는 민화를 대상으로 한 그의 실험이 요체만 남은, 고도로 정제된 극치에 달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캐스퍼 강의 작품은 형상 없는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은하에는 한지의 물성과 이것에 물리적 변화를 가하는 작가의 행위, 그리고 깊은 정신의 무늬가 교착되어 있는 까닭이다.

 

식물섬유가 원료인 한지는 보존 기간이 길고, 높은 탄력성과 번짐성을 갖는다. 4) 한국의 전통 유산을 재해석해온 강 작가는 이러한 한지의 물성을 이용해 무한한 실험의 가능성을 열었다. 여기서 그의 실험이란 물리적인 가해를 가함으로써 한지의 물성을 비워내는 일이다. 명상하듯이 한지를 그을리고 락스로 표백하며, 가르고 닳게 하는 것이다. 종국에 그는 ‘공백’을 향한 열망을 태우며 최후의 무엇까지 발돋움하다가, 소멸의 직전에 이 쇄도하는 스파크를 일순 거두어낸다. 그러면 한지의 남은 입자와 시간, 작가의 의식이 일체로 유보된 상태를 유지하며 화폭을 부유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바탕이었던 물성이 비워진 자리에 ‘물질의 무의미함’을 채운 후, 몰려드는 공허를 영원성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캐스퍼 강의 별들은 허공의 무궁함으로 유동하면서도 황량하지 않다. 번득이는 것은 도리어 초월적인 울림이다.



* 각주

1)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천병희 역 (서울: 단국대학교출판부, 2002), 141.

2) Svetlana Boym, The Future of Nostalgia (New York: Basic Books, 2001), 7.

3) Edward Muir, Ritual in Early Modern Europe (Cambridge: Cambridge UP, 1997), 81.

4) 김재필, 『한국의 천연염료』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4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