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Sunday
이페로
Epäro
2025 / 10 / 09 - 2025 / 11 / 01
Sunday
이페로 개인전
라흰 조은영 큐레이터
이페로 작가의 작업에 드러나는 여러 양상들은 ‘나타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의 봉착’이라 일괄하여도 무리가 없다. 2022년에 개최했던 라흰에서의 개인전을 전후로 그는 ‘스와이프 아웃 (swipe out)’ 시리즈를 이어오고 있는데, 이 작업은 마치 휴대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밀어 넘기듯, 캔버스에 쌓아올린 형상을 담대하게 허무는 데에 주안점을 두는 까닭이다. 그런데 본 전시에 앞서 이페로는 화면 전체를 밀어버리거나 부분을 무너뜨리고 형상 위에 선들을 무심하게 긋기를 반복하며, 긋고 뭉개는 스와이프 아웃의 파괴적인 국면으로부터 보다 새로운 지형과 방향성을 고민했다. 그리고 난파되는 듯이 화면에 돌출하는 선들은 점차 영역을 확장하기에 이르는데, 이번 개인전에서 살펴볼 수 있는 이페로의 작업에서는 이처럼 화면을 무너뜨리는 선의 양상이 마치 낙서나 돌연적인 추상의 덩어리처럼 정밀하게 이어지고 있다.
정교한 형상을 구축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정점에 이르렀다 스러지는, 이다지도 엇갈린 행보에 구체적인 물음을 제기하기에 앞서, 우리는 스와이프 아웃의 밑바탕에 대체로 ‘정물’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물은 반복적인 작업의 과정과 인내심만 뒷받침된다면 큰 변수 없이도 세밀한 완성물에 이를 수 있는 장르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어느 것에도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안정적인 가정과 같이) 견고한 터전을 갈망했는데, 정물은 분절된 호흡으로도 무리 없이 그림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가 내심 바랐던 일상의 질서와 동승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정물이 화면에 고르게 안배되자마자 작가는 그것과는 대척된, 즉흥적인 선으로 형상을 곧장 파묻는다. 빠르고 경묘하게 파묻는다. 질서의 작동 기제에서 벗어난 이 행위는 언뜻 이미지의 소거에 가까워 보이지만, 이페로의 지우기는 상술한 바와 같이 소거이기에 앞서 ‘나타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의 양자를 품은 지형으로 탐구된다. 말하자면 뭉개짐이 있기 전후의 이미지는 씨실과 날실로 엮여 있으며, 양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당위성이자 존재의 이유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이페로의 선을 긋는 작업 과정은 소거의 일방통행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를 향해 솟구치며 새로운 층위를 만드는 창작이다.
한편 이페로의 그림에서 이성적인 구획을 탈피하여 화면의 저변을 관류하는 선들은 그의 작업을 이렇듯 또 다른 창작의 분기점에 이르게 하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다. 선은 즉흥과 찰나의 무한한 카니발을 산출할 수 있는 조형 언어인 까닭이다. 작가는 절차나 형식 없이 흐르는 선들의 굴절, 스미듯이 젖고 바스러지며 마르는 감각, 단색과 다색의 얽힘, 질주와 머묾이 교차하는 호흡을 포괄하며, 수십 년의 붓질로 몸에 밴 기세와 궤도에 따라 선을 긋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셈하는 마음이 깃들 틈이 없다. 즉흥이 즉흥을 부르고, 그러한 연쇄가 또 다른 우연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시착하는 선들은 (면 面과는 달리) 완전히 제 모습을 감췄다가도 은근히 모습을 내밀면서, 미묘한 긴장과 떨림을 내내 화면의 전열에 놓고 있다. 그리고 거침없는 움직임이 견인하는 이 덧칠의 행위는 다름 아닌 ‘쾌감’의 감정을 존재 근거로 삼는다. 이페로의 선 긋기는 순간적인 에너지를 요하는 만큼 매번 손끝을 팽팽하게 긴장시키지만, 선이 유화 물감의 질감을 밀어 올리며 뚫고 나올 때마다 화면에는 묘한 희열이 번지는 것이다. 전시명인 ‘선데이 (Sunday)’의 뉘앙스는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 내포된 ‘긴장을 머금은 감흥’을 잘 함의하는 대목이다. 일요일에는 휴식에의 갈망과 의무의 무게가 늘 맞물리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느슨한 기쁨과 해방의 순간이 한주의 문턱에서 팽팽함을 가르며 느껴지듯, 가느다란 떨림을 감싼 희열과 자유, 경묘한 사색들이 그의 화면에는 깃들어 있다.
한편 이페로의 그림에서 화두가 되는 지우기나 파괴의 개념은 현대 미술의 담론에서 결코 낯선 발상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의 자유, 비판과 저항, 관습의 해체를 둘러싼) 인식의 가능성을 포괄하는 일종의 선언으로, 현대 미술의 주류적인 흐름과 태도에 이미 자리를 잡고 편입되어 왔던 것이다. 굳이 잠깐 시선을 돌리자면, 가령 리히터 (Gerhard Richter)와 라우셴버그 (Robert Rauschenberg)의 작업으로부터 우리는 해체와 비판, 재창조 정신을 측량할 시금석으로서의 지우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페로는 ‘무용에 가까운 노력’을 기울여 정물을 완성에 근접한 상태로 만든 후에 그것을 우발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에서, 누구에게서도 특징을 물려받지 않은, 예측 불가능한 지대로 나아간다. 아울러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페로의 작업은 ‘완성’의 개념을 유예한 채, 그것이 고정된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열린 과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오래 묻어둔 미완의 그림들을 불러내어 이따금씩 되살리곤 하는데, 그러한 경우에는 세월에 의해 발효된 감각들이 표면에 겹겹이 중첩됨으로써 회화가 ‘무한한 생성의 장’으로 나아가게 된다. 작가의 그림은 이렇듯 ‘완성–파괴–기억’이 끊임없이 서로를 그어내고 덧쓰는 열린 시간의 장이 된다는 점에서, 어떠한 면에서는 일종의 팔림프세스트 (Palimpsest)적인 과정을 구축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페로의 이번 개인전 《선데이》는 담론이나 표지, 정지된 형태와 완결된 현상을 도출할 출구를 찾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다. 설령 출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출구가 아니라 불온함을 지니는 또 다른 무형으로의 입구일 것이다. 상기했다시피 이페로가 정교한 형상을 주저 없이 지워내는 것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형상 너머에 잠재한 또 다른 가능성을 열고 화면을 ‘끝맺음’에서 해방시키는 행위인 까닭이다. 이러한 태도는 형상과 질료를 엄격히 분리하지 않고, 세계를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고 변하는 ‘과정’으로 이해해 온 동양의 사유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그러한 흐름을 비추어 볼 때 선을 그어 형상을 허무는 이페로의 행위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역동적인 조건이며, 작위를 내려놓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허용하는 무위 (無爲)의 태도를 내면화하고 있다. 본 전시에서 작가가 형상의 표면에 새겨지는 선들을 별개의 드로잉으로 모아 (캔버스 작업과 병렬되는) 또 하나의 장을 여는 이유도 무위에 다가가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그의 드로잉은 완결을 전제한 조형의 종국적인 방향성을 벗어나, 사유와 감각이 자유롭게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비움의 틈이 마련될 때 이미지들은 비로소 스스로 생성되고 변화하며, 화면은 새로운 형태와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궤도로 진입하게 된다. 스스럼없이 파란을 받아들이는 이페로의 작업은 이처럼 현존과 부재, 생성과 소거가 교차하는 리듬을 형성하면서, 무형의 미지라는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이 모순된 여로의 반복 끝에 회화를 쉼 없는 생성의 장으로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