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공간

La Rêverie Intime – l’espace où l’âme résonne


윤향란 & 서원미 

Yoon Hyanglan & Seo Wonmi


2025 / 08 / 08 - 2025 / 09  / 20

 

시적 공간


라흰 조은영 큐레이터


혹자는 상상력이 추상적 사고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공중에 뜬 창조력이 아니다. 상상력은 기억과 감성, 몸의 경험이 응축된, 생활이 안착된 장소에 뿌리를 내린 감각적 체험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바슐라르 (G. Bachelard)는 이렇게 발화되는 상상력의 촉수로 인해 모든 것이, 특히 모든 것 속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하찮고 반복되며 익숙한 것이 무화 (無化) 일로를 뚫고 새로운 깊이를 부여받는다고 논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상상력은 또한 보통의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체험되는 이 일상적인 것의 내면적 진동을 추적함으로써 궁극에는 몽상으로 심화된다. 크게 보아 몽상은 목적이 없는 사고이자 유예된 시간 안에서 존재가 그럴 수 없이 조용하게 울리는 순간들이며, 선형적이라기보다는 나선형으로 움직이면서 무한으로 굴절한다. 부연컨대 우리는 그러한 몽상의 저 깊숙한 곳에서 느리게 침잠하며 세상을 나직하게 관조하는 것이다.


한편 일상적인 것과의 내밀한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감각과 기억이 심층적으로 교차할 때, 우리의 내면에서는 일종의 몽상적 공간이 상상력의 틈에서 탄생하게 된다. 경험하는 ‘나’에 대한 인식과 신체를 바탕으로 무한한 가치를 포함하는 이러한 공간은 실제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력을 가지고 내면화하는 장소다. 바슐라르는 정신이 공명하는 이 공간을 이른바 ‘시적 공간’으로 명명한 바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바로 시적 공간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데에 예술가의 상(像)이 크게 기여한다는 사실이다. 예술가의 상상력과 경험, 감정이 내면화된 작품은 그것이 근거하는 물리적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면서 시적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의미들과 함께 증식하는 까닭이다. 


본 전시 《시적 공간》은 이상과 같은 바슐라르적인 사유를 매개로 윤향란과 서원미 두 작가가 구축하는 시적 공간의 양상을 가늠해보고자 기획되었다. 여기서 이들의 작품으로 소환되는 시적 공간의 지표는 특별히 선 (線)의 형식에 힘입어 더욱 선명해지는 측면이 있다. 두 작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선을 다루고 있으나, 이들의 선은 감각의 궤적이나 내면의 울림, 그리고 무한한 몽상의 흐름을 좇아 공간을 다시 쓴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전시는 이처럼 윤향란과 서원미의 작품을 일상적인 것을 승화하는 상상력과 몽상의 결과물로 제시하고, 작품의 저변에서 기억과 감정과 공간이 맞닿는 자리에 놓인 선들이 어떻게 다음 국면으로의 전환을 야기하며 우리를 시적 공간으로 진입케 하는지 탐색하고자 한다.


# 윤향란


작가 윤향란의 작업 세계는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하려는 노력에 힘입어 결과하는 것으로, 그와 같은 작품들의 근저에는 언제나 선을 근본으로 하는 표현 충동이 자리해왔다. 초기에 그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배추나 민들레, 나무, 산책길 등을 드로잉 한 후에 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콜라주와 데콜라주 작업에 집중했으나, 최근에는 특정 대상으로부터 벗어난 ‘즉흥 드로잉’ 시리즈를 통해 보다 자유롭고 역동적인 선의 세계를 모색하고 있다. 즉흥 드로잉 연작은 선의 조형 언어를 동원한 드로잉과 조각으로 구성되는데, 이번 전시에서 윤향란이 선보이는 작품들도 이와 같은 시리즈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가령 평면 위에 오일 크레용으로 색과 선을 겹치고 뭉갠 드로잉은 일견하기만 해도 고착되지 않은, 생생한 선의 파고와 (그래픽한 것을 넘어선) 회화적인 깊이가 출렁거린다. 또한 선 조각은 광목천을 자르고 바느질한 후 여기에 와이어를 넣어 제작되는데, 이렇게 완성된 선의 덩어리들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양 한껏 뒤틀리고 구부러지면서 드로잉에서 드러났던 선들을 삼차원의 공간으로 옮겨낸다. 


더욱이 상기의 작업의 과정에서 작가가 특정 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점화되는 에너지를 몽상하듯 살핀다는 사실은 윤향란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에 대단히 유효하다. 요인즉 그의 작업의 향방은 작가의 내면에 축적된 조형 언어에 의해 자발적이고 유동적으로 결정지어 진다. 이를테면 그의 드로잉은 이따금 낙서나 미완성의 그림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내면의 즉흥적인 표현 욕구를 존재 근거로 삼는 작가의 행위로 인해 각각의 선들이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는 자기만의 고유한 비상을 시도한 까닭이다. 기성의 질서와 동승하거나 조금의 억지라도 묻어날 경우에 그의 선 긋기는 영락없이 실패하고 만다. 베일에 싸인 감정과 정신의 균형을 잡고, 시공간의 동조를 통해야만 비로소 한 줄의 선이 완성된다. 말하자면 윤향란의 작업은 정신을 수양하는 듯한, 구도 (求道)의 에스프리를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바슐라르의 시적 공간은 주지하다시피 정서적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과 세계를 새롭게 마주하는 ‘사유의 울림통’으로 빗댈 수 있는데, 이상과 같은 윤향란의 작업은 시적 공간을 둘러싼 의미 있는 사색의 장을 마련한다. 예컨대 그의 드로잉에서 평면 위의 선은 자신의 궤도를 벗어나 공중으로 진입하듯 선과 선 사이로, 외부와 내부에서 동시에 새로운 공간을 연다. 선들이 얽히면서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파급하는 양상은 선 조각에서도 나타나는데, 특히 삼차원에서 겹친 선 조각들은 작업을 보는 관객의 위치와 시야가 달라질 때마다 예측하지 못한 형상과 공간감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한 형상이란 물론 작가가 일상에서 경험한 것들이 그의 내면에 축적되어 있다가 작업을 통해 임의롭게 표출된 것일 테다. 그렇다면 균형을 탈주하고 탈주를 탈주하는 윤향란의 선은 (그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생성과 활성을 멈추지 않는, 시적 공간이 갖는 제 본연의 무한한 감각을 굴절하는 선으로 스케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서원미


서원미 작가의 전작 (前作)과 비교했을 때, 본 전시에서 그가 선보이는 작업들은 환경적인 요인이라는 어떠한 우회를 거쳐 다가가 봄직하다. 이러한 요인이란 이를테면 그림을 그리는 데에 부지불식간에 작용했을, 작업실을 오가는 소로 (小路)에서의 지극히 사사로운 마주침이나, 작가가 거주하는 파주에서 유달리 선연한 소리, 향기, 촉감의 풍경으로 존재하는 일상을 의미한다. 도시의 불빛이 닿지 않음으로 인해 오히려 정경의 다양한 징후들을 조감할 수 있는 이곳에서, 서원미는 ‘그림을 그리러 가는 일상의 여로’를 반복하며 근작의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작가는 현실을 묘하게 비켜난 상상의 각도가 이와 같은 여로의 가운데에서 분분하게 소환되고 있음을 포착했다. 가령 늦은 밤 파주 작업실을 나와 돌아오는 길에는 대남방송의 음향이 어둠을 째고 울리는데, 그럴 때마다 서원미는 늑대나 유령이 내는 듯한 소리를 듣거나, 특정 시간대와 분위기가 불러오는 다듬어지지 않은 감각에 주목하곤 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일상을 새롭고 낯선 차원으로 들여놓는 상상의 지대를 걷게 되는데, 이처럼 일상적인 무언가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상상력의 의미를 고양하는 작업의 배경을 통해 우리는 상술하였던 바슐라르적인 뉘앙스를 서원미의 그림에서 감지해볼 수 있다.


서원미가 이렇듯 일상에 뿌리를 둔 감각적 체험과 그것에 기인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리는 대상은 바로 ‘말 (mal)’이다. 의미를 형성하기보다는 입에 담기도 전에 떠내려가는 말들과 마주하기 위해, 그동안 작가는 말 (words)과 말 (horse), 말을 능숙히 부리는 카우보이의 등장과 활주가 펼쳐지는 그림으로써 그의 머릿속을 뛰놀고 그의 혀를 맴도는 말의 모습을 탐색해왔다. 그런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작가는 문장의 딱딱한 관절이 형성되기 이전의 언어, 언어 이전의 날것의 감각, 더 나아가서는 감각이 있기 전의 미세한 진동을 가능한 한 그대로 화면에 들여오기를 시도한다. 그래서 그는 (매일같이 반복하는 탓에) 피부에 밀착해 있는 감각에 보다 집중하며, ‘어떻게 감각할 것인가’의 문제를 궁리하고 실현하는 쪽에 섰다. 서원미의 근작에서 다소간 추상으로 기울어지는 요소들이 점차 자주 발견되는 것은, 이처럼 말의 실체를 포착하기보다는 말들을 운용케 하는 감각에 몰입하려는 의지가 작업의 화두가 된 결과다. 


한편 우리는 의미의 겨냥을 빗나간 말의 생살, 언어의 불가해한 군집과 괴리가 서원미의 피부에 어떠한 감각으로 맞닿아 그의 손끝을 타고 어떻게 지났는지를, 다름 아닌 물결처럼 화면을 부유하는 선을 통해 파악하게 된다. 요컨대 서원미에게 선은 ‘감각이 지나간 자국’으로, 그의 선은 구조와 형태를 구성하는 요소를 넘어선, 자체로서의 움직임이자 감각의 프리즘을 제공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작가의 작업에는 진동하는 말소리, 한 곳으로 모이지 않는 음성, 혹은 숨결을 닮은 선들이 쉼 없이 떠다니는데, 이를 통해 그림은 감각 그 자체로 기립하고, 관객은 그가 체험한 감각의 선명한 궤적을 화면에서 더듬어보게 된다. 더욱이 감각이 대체로 날씨처럼 바뀌는 기억과 감정, 공간에 따라 변전하기 마련임을 고려할 때, 서원미는 작은 진동으로부터 비롯되는 붙잡을 수 없는 말을 좇고 좇아, 궁극에는 이 과정에서 접하게 된 찰나의 무한한 감각들을 그림으로 내면화한다고 하겠다. 더구나 이와 같은 지점에서 작가는 본 전시가 모색하는 시적 공간의 진정한 처소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바슐라르의 몽상적이고 비가시적인 시적 공간은 상술했다시피 감각적인 요소들을 통한 심리적 체험과 무한한 가치의 확장, 그리고 정신의 울림을 골자로 삼지 않던가. 그러한 관점에서 서원미의 그림은 매일의 빛과 대기의 밀도, 일상의 리듬 속에서 발하는 감정의 변화 등을 경험케 함으로써, 시적 공간의 깊은 음영을 산출하고 그것의 경계를 더 멀리 가져가고 있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