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궤도
Stroke Drive 


박정호

Park Jungho


2025 / 04 / 24 - 2025 / 05  / 10

감각의 궤도 (Stroke Drive)


박여정, 박희진 (유)티씨씨


도시는 선이다. 선은 흐름이고, 흐름은 서사다. 《감각의 궤도(Stroke Drive)》는 도시를 구성하는 리듬과 구조를 해체하고, 그 감각적 조각들을 다시 쓰는 시적 실험이다. 전시 제목에서 ‘Stroke’는 손끝의 터치와 드로잉의 흔적, 몸의 궤적을 가리키며, ‘Drive’는 도시를 밀고 가는 추진력, 사회를 작동시키는 보이지 않는 압력을 의미한다. 박정호는 이 두 개의 상이한 운동을 겹쳐 도시의 물질성과 비물질성이 교차하는 지점을 탐색한다. 그의 손끝에서 그어진 선들은 기계적 궤도와 맞서고, 감각의 리듬은 구조의 지도를 비틀며 익숙한 도시를 낯설게 재편한다.


전시는 총 네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층은 도시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감각의 레이어를 탐색한다. 박정호는 드로잉, 영상, 설치, 조각을 넘나들며 도시에 깃든 신호와 질서, 불안과 파편, 기억과 흐름을 수집하고 재조립한다. 그 과정은 도시라는 유기체의 심장박동을 읽는 감각의 여정이다.


선으로 쓰는 도시

1층에서는 박정호가 직접 걷고 마주한 도시의 단면을 손으로 그린 드로잉으로 풀어낸다. 이는 우리가 익히 아는 지도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박정호는 도시를 걷는다. 그것도 목적 없이, 계획 없이, 표류하듯 걷는다. 거리의 구조는 목적이나 계획이 아닌 감각의 궤적으로, 건물은 형태가 아닌 기억의 응집으로 나타난다. 그의 드로잉은 도시를 걷는 행위 자체의 시간적 잔상이며, 건축적이라기보다 신체적이고 도시적이기보다 내면적이다. 선들은 불규칙하고, 겹쳐지고, 소멸하며, 때로는 주저하고, 때로는 폭발한다. 그것은 도시의 형상이 아니라, 도시를 구성하는 감각의 파편들이다. 이러한 작업은 20세기 중반 기 드보르(Guy Debord)가 주장한 ‘심리지리학(psychogeography)’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드보르는 『스펙타클의 사회(La Société du spectacle)』에서 도시를 소비주의와 권력의 시선으로 구성된 스펙터클의 공간으로 보았고, 이 안에서의 진정한 경험은 방향 없이 걷는 표류(dérive)를 통해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박정호의 드로잉은 이러한 표류의 시각적 잔상이며, 도시를 다시 걷고 다시 쓰기 위한 도식이다. 비슷하게 프랜시스 알리스(Francis Alÿs)는 자신의 걷기를 기록하며, 예술적 개입 없이 공간 자체가 말하도록 하는 전략을 펼쳐왔다. 박정호는 도시를 통제하지 않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숨결을 따라 그린다.


영상으로 유동하는 감각과 구조

2층에 이르면 드로잉은 디지털 영상으로 전환되어 하나의 스크린 안에서 부유하고, 겹쳐지고, 소멸한다. 선들은 회전하고 충돌하며 공간적 깊이를 만들어내어 드로잉과 영상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작가에게 영상은 더 이상 서사적 연속이 아니라, 드로잉의 잔상이며 조각의 시간적 변주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말한 것처럼, 중심 없는 구조는 항상 해체될 수밖에 없고, 이 해체는 시각적 이미지에서도 일어난다. 데리다는 모든 기호는 그것이 놓인 문맥에 따라 언어적 의미가 끝없이 미뤄지며 결코 고정된 중심을 갖지 못한다고 보았다. 박정호의 영상 작업은 이러한 비결정성의 구조를 드러낸다. 드로잉으로부터 파생된 선들은 영상 속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며, 중심 없이 구성된 장면들로 관객을 이끈다. 화면 위에서 선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며, 그때마다 각기 다른 구조, 리듬, 공간감을 생성한다. 이 영상은 도시의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감각하는 방식의 구조'를 드러낸다. 이는 그가 도시를 고정된 대상으로 보지 않고, 끝없이 재편성되는 유기체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상징한다. 그의 영상은 우리가 익숙히 믿어온 질서, 방향, 시작과 끝의 개념들을 흔들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감각적 통찰을 길어 올린다. 드로잉이 영상이 되고, 영상이 다시 시공간 속에서 조각처럼 자리 잡는 이 과정은, 도시 자체가 갖는 유동성과 불완전함을 시각화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질서 위의 질문

3층의 <그려진 장면>(2025)은 삼각형 도로표지판 위에 영상을 투사하는 설치 작업으로,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작품은 손으로 그린 드로잉 애니메이션으로 전개되며, 주인공은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쫓기듯 화면 속 공간을 헤멘다. 그는 방향을 잃은 듯하지만, 그 안에서도 길을 찾고자 하는 의지를 내비친다. 공간은 병렬적으로 끝없이 이어지며, 하나를 빠져나오면 곧바로 그 다음이 열린다. 이는 계속되는 표류의 감각이며 박정호는 이를 통해 도시 안에서의 존재감과 유동적인 내면을 시각화한다. 이 작업은 동시에 공공 공간의 시각 질서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기도 하다. 도로표지판은 규범과 통제를 상징하지만, 박정호는 그 위에 유동적이고 탈중심적인 감각의 내러티브를 투사함으로써 일상의 권위적 구조를 흔든다. 이는 제니 홀저(Jenny Holzer)가 LED 전광판으로 공적 언어를 재배열하거나, 데이비드 워조나로비츠(David Wojnarowicz)가 거리의 간판과 표지판을 전복적으로 사용한 방식과도 연결된다. 박정호는 표지판이라는 구조물에 불안을 얹고, 표류의 감각을 투사함으로써 이를 통해 도시가 제시하는 일방적 흐름을 비틀어 질문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도시의 이면, 신호의 파편

지하층의 <지연된 감각>(2025)은 도시를 구성하는 비가시적 시스템, 즉 통신망, 감시체계, 신호망 등의 내부 구조를 형상화한 설치 작업이다. 파이프 구조물로 구성된 공간 위에 반복 투사되는 흑백 영상은 도시에 내재한 흐름을 ‘보이지 않는 기계-유기체’로 드러낸다. 『천 개의 고원』(Mille Plateaux)에서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는 도시를 단일한 구조가 아니라 무수한 흐름과 접속점들의 집합체로 보았으며, 모든 사회적 시스템은 일종의 ‘배관 구조’처럼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박정호는 이와 같이 도시를 명료한 형태가 아닌 끝없이 이어지는 흐름의 체계로 인식한다. 그는 그 안의 긴장과 진동을 조각과 영상의 중첩을 통해 전달하며, 도시라는 유기체가 품은 내부의 구조를 감각적이고도 구조적인 방식으로 시각화한다. 이 작업은 도시의 이면을 직시하게 하며, 도시 속 존재들에 대한 시각적 사유를 이끌어낸다.


박정호는 도시를 재현하지 않는다. 그는 도시를 기록하는 작가이자, 도시를 ‘사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드로잉은 기억이고, 영상은 질문이다. 설치는 흐름 속에 잠긴 감각의 조각이다. 《감각의 궤도》는 우리가 너무 익숙해진 도시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게 한다. 선은 감각의 잔상이고, 그 잔상은 우리가 걷는 도시라는 신호 위에 겹쳐지는 또 하나의 감각 지도다. 익숙한 골목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박정호의 도시가 잠시 관객 안에 스며든다. 이 전시는 묻는다. “지금 나는 어떠한 감각의 궤도 위에 놓여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서, 우리는 익숙한 거리의 낯선 심장 박동을 듣게 된다. 그 떨림이 스며드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도시를 걷는 이가 아니다. 도시를 감각하는 존재로, 그 안에 머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