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

Babel


고요손  & 조셉 존스 

Goyoson & Joseph Jones 


2026 / 04 / 25 - 2026 / 05 / 30

 

바벨 Babel


라흰 조은영 큐레이터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뜻에 도달하는 세계란 얼마나 그럴듯한 환상인가. 하지만 이 몽매한 상상은, 한때 세계를 하나의 말 아래 붙들어 둘 수 있으리라는 믿음의 외피를 둘렀다. 이를테면 그것은 창세기가 전하는 저 유명한 바벨탑의 서사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우리 이름을 날리자”, “온 땅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고 말하며, 하늘을 향한 수직적 욕망을 동인 삼아 한 울타리 안에 머물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의 혼탁한 열정은 주지하다시피 속절없이 무산되고 만다. 바벨 이후의 세계는 넘쳐나는 말과 빗나가는 의미들로 채워지고, 관계는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휘발적인 형식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바벨은 단일한 질서로 종내 응집되지 못한 세계의 알레고리와도 같다. 전시 《바벨》은 이 미완의 상태를 출발점으로 삼아, 오차 없는 소통의 이상이 이미 파기된 이후에도, 인간이 어떻게 타자에게 말을 건네고 시선을 머물게 하며 관계를 포기하지 않은 채 서로에게 닿아 왔는지를 되묻고자 한다.


방점은 이러한 접근이 거대 담론이나 구조, 정신적이거나 성스러운 것을 향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바벨》의 시선은 계속해서 아래로, 지상적인 것으로 하향화되어, 덧없이 스치고 사라지는 작고 연약한 것들의 곁에 머문다. 수직적 탑이 전복된 곳에서 발아하는 이 수평적 응시는, 영속적인 것에 대한 갈망보다 우리 자신의 유한함을 닮은, 쉽게 시들거나 오래 붙들 수 없는 대상들에 깊은 애착을 기울이게 한다. 꽃과 동물은 이와 같은 유한성을 우회적으로 표출하는 대표적인 존재다. 짧은 생을 살고도 끝내 완전히 이해되거나 소유되지 않기에, 우리는 그 앞에서 더 오래 머물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같은 머묾의 자리에서 관계는 설명과 합의의 질서를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열린다. 미약한 존재를 향한 애정은 필경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관계를 거두지 않는 태도라는 점에서, 그러한 새로운 관계의 한 형식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 관계가 해소되지 않는 차이를 품은 채 지속된다는 점이다. 상기했다시피 바벨 이후 인간에게 남은 것은 뒤섞인 말들과 흩어진 존재들 사이를 오가며 이어지는 미세한 접촉인 까닭이다. 《바벨》은 이 접촉의 형식을, 제목으로부터 예기되는 거대한 서사와 실제 전시장에서 마주하게 되는 미시적이고 소박한 대상들 사이의 간극을 통해 드러낸다.


이상의 맥락에서 볼 때, 본 전시가 바벨탑을 재건하거나 세계를 다시 하나의 질서로 포섭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은 자명하다. 《바벨》이 더듬는 것은 공통의 기준이 더는 주어지지 않는 조건에서, 감각과 형식, 시선과 돌봄을 매개로 관계가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요손과 조셉 존스의 작업은 서로 다른 매체와 어법을 구사하면서도, 전달의 명료함이나 해석의 합의에 앞서는 이와 같은 섬세한 연결의 가능성을 각자의 방식으로 시각화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어긋남 이후에도 소멸하지 않는 관계의 지속을 고민하고, 그것이 오늘의 감각 안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탐색한다.


# 고요손


무엇이 조각을 성립시키고 또 어떠한 조형 언어가 조각이 되는가, 하는 물음은 고요손의 작업을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가 된다. 그는 조각을 고정된 오브제로 환원하는 기성의 질서를 탈피하여, 그것이 타자와 공간, 사건과 어느 양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오랜 시간 의식하고 실험해왔다. 예컨대 초기작에서부터 그는 시나리오와 무대 장치, 소리와 퍼포먼스적인 상황을 전시장에 조성하여, 여기에 놓인 조각이 (비록 부동의 상태로 머물지라도) 타자의 개입과 시간의 경과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장면으로 변주될 수 있음을 탐색하곤 했다. ‘조각활용극’이라는 이름 아래 개별 조각들을 무대이자 등장인물로 기능하게 했던 시도 역시, 조각이 무엇을 재현하는가보다 어떤 관계와 상태를 발생시키는가를 묻는 실천의 연장이었다. 다시 말해 고요손의 조각은 스스로를 완결된 대상으로 내세우기보다, 하나의 상황을 마련하고 감각의 흐름을 열며 아직 정리되지 않은 관계의 장면을 발생시키는 매개로 이해될 수 있다.

 

고요손의 이러한 조각적 탐색은 《바벨》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무너진 언어를 대신해 의미를 복구하거나 설명의 공백을 메우기보다, 말이 충분히 가닿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누군가와 함께 서서 어떤 것을 바라보고 머물게 하는 물리적 조건으로서의 조각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접속이 어긋난 뒤에도 소거되지 않는 관계의 잔여이자, 서로 다른 언어 사이에서도 멎지 않는 작은 움직임이며, 무언가의 곁에 머무는 응시의 감각이다. 따라서 바벨이라는 이름이 수반하는 총체적인 구조나 장엄한 서사의 상상은 그의 작업에서 한발 물러나고, 그 자리에는 (파편화된 의미들이 서로를 겨냥하는 불통의 소요 가운데서도) 관계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미미하면서도 다만 세밀한 지속만이 남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작가는 이전처럼 퍼포먼스의 외형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절제된 구성을 통해 조각이 놓이는 방식을 재고하고 있다. 가령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업들 가운데에는 조셉 존스의 회화와 서로 기대어 서서 관계적 배치를 이루는 조각이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두 매체가 독립된 대상들의 병치에 머물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지지체이자 조건이 되는 장면을 구현한다. 그의 또 다른 작업들은 회화를 향해 빛을 드리우거나 빛과 위치의 관계 자체를 하나의 조형적 구조로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조각을 불변의 결과물이 아니라 관계가 유동적으로 조율되는 열린 장면으로 선보인다.


한편 고요손의 조각은 이렇듯 관계의 구조를 구축하면서도, 그것을 추상적 관념에 가두지 않는다. 그 관계망이 재료의 성질과 표면의 감각, 균형을 다루는 방식, 그리고 유한한 것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구체적인 조형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특히 스티로폼처럼 가볍고 쉽게 수정할 수 있는 재료, 미적 수사를 덜어낸 구조물, 빛의 변화에 따라 반짝이다가도 흩어질 듯 지각되는 표면 등은 조각이 (공간을 점유하는 물질인 동시에) 잠정적으로 성립하는 장면이 되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감지되는 무상함은 종말의 비극이 아니라, 소멸 직전의 문턱을 증언함으로써 대상을 더욱 섬세히 바라보게 하는 유연함에 가깝다. 또한 이 감각은 그가 조각을 대하는 관점과도 맞닿아 있다. 작업의 과정에서 고요손은 덩어리와 무게감, 공간에서의 밀도를 통해 조각이 주변과 어떤 균형을 이루는지를 오랜 시간 살피기 때문이다. 조각이 스스로의 자리를 찾는 추이를 한 번 더 지켜보려는 이 기다림을 그는 ‘돌봄’의 태도로 이해한다. 작가에게 돌봄이란 유약한 것을 보호하는 일이 아니라, 재료를 재단하지 않음으로 하여 물성 고유의 자생적 균형을 존중하는 관계 맺기인 셈이다. 고요손의 조각은 그렇게 형상과 의미를 서둘러 봉합하지 않은 채, 불일치와 간극 앞에서도 우리가 같은 장면을 함께 바라보도록 자리를 열어두며, 관계가 단절로 기울지 않게 하는 미세한 지속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 조셉 존스


조셉 존스의 작품이 출현한 문맥은 우리가 현실과 관계 맺는 방식을 되짚어보게 하는 어느 갈피에 놓여 있다. 그의 회화는 우리가 날마다 애착을 부여하는 대상들을, 고양된 수사를 동원하지 않고도 매체 본연의 물질성으로 여기의 시공에 정착시키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꽃과 고양이, 새처럼 (시대적 뉘앙스를 불문하고) 친화적인 아이콘으로서의 담론을 소비해 온 이미지들과, 스스로를 말로 표명할 수 없는 이 존재들의 취약성에 주목한다. 그런데 존스의 그림에서 이들이 환기하는 애착과 돌봄의 감각은 충실한 모사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소셜미디어와 책, 신문 등에서 수집한 시각적 파편들을 천천히 선별하고 응축한 결과로 나타난다. 그의 이미지가 정확한 실재의 초상도, 답습된 도상도 아닌 채 구체성과 원형성 사이에 머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또한 그가 다루는 형상은 명료한 가시성을 지니면서도 특정한 설명이나 상징적 독해로 기울지 않음으로써, 대상을 전형화된 도상이 아닌 생명력을 지닌 개별 존재로 직시하게 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작가는 존재를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주의를 거두지 않거나 취약성을 인정하는 태도가 화면을 조직하는 원리로 어떻게 스며드는지를 살피고 있다.


이 같은 인식은 그의 회화의 형식 언어가 재조정되는 주요한 동력이기도 했다. 작가의 초기작들이 서사적 밀도에 집중되었다면, 근작에서는 배경이나 소품, 장소성을 덜어내고 고양이 한 마리나 꽃 한 송이 같은 단일한 모티프가 화면 중심에 부유하듯 배치되기 때문이다. 주변 정보를 지워내고 정적을 머금은 대상에게 온전한 ‘자리’를 내어주는 이 양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명상적 정련에 가깝다. 그의 회화의 핵심은 따라서 대상의 정서를 조율하는 미묘한 ‘결’의 문제에 있는데, 이는 참고 이미지로부터 기울기의 각도나 털의 밀도, 빛의 온도 등을 조정하는 일부터 시작해, 캔버스 위에서 구도와 색, 표면과 붓질을 서서히 빚어가는 수순으로 이어진다. 아울러 그가 같은 모티프를 거듭 다루는 행위는 표정이나 포즈의 사소한 차이, 색의 온도 같은 감각의 편차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는 실천인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그림 앞에서의 시선을 서두르지 않게 하는 장치가 되고 있다. 고요손의 작업에서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놓이고 기대는 관계의 조건이 확장된 장면으로 구축된다면, 존스는 하나의 미약한 존재를 둘러싼 감각이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고요한 응시의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조셉 존스의 회화는 바로 이러한 머묾의 시선 위에서, 바벨의 이름이 건설하려는 통념적 규모를 탈각하여 이 서사를 되레 작고 조용한 차원의 감각으로 다시 쓴다. 그에게 바벨의 형상이란 이미지의 증식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불완전한 이해와 시각적 소음에 다름 아닌데, 존스는 그러한 표지에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정제된 조형 언어로 재편하는 편에 서는 것이다. 특히 작가의 회화는 표면의 아름다움이 주는 즉각적 만족을 유예함으로써, 그 자신이 포착하려는 것이 임박한 변화를 앞둔 찰나의 유예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시들고 사라지는 생명의 유한성을 조용한 자각으로 전환하는 이 작업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화면에 사려 깊은 애정의 기류를 불어넣는 요인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역설하려는 정적(Stillness) 역시 작고 여린 존재가 제 모습을 충분히 발현할 수 있도록 허락된 감각적 공간인 바, 바벨 이후에도 걷히지 않은 주의와 돌봄의 감각은 존스의 회화에서 이처럼 지연된 머묾의 순간으로 나직하고도 선연하게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