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ve you ever seen a swallowtail?
강종길
Kang Jonggil
2025 / 11 / 13 - 2025 / 12 / 13
제비의 노정 뿐만 아니라
황재민 (미술평론가)
흥보는 욕심 많은 형제 놀보에게 수모를 당하고 내쫓긴다. 궁핍을 이기지 못하고 매품을 팔며 연명하던 흥보는 우연히 다리 부러진 제비를 마주치고, 그 다리를 고쳐 날려 보낸다. 제비는 박씨를 물고 와 보은하고, 씨에서 자라난 박으로부터 금과 쌀이 샘솟는 궤짝이 나와 흥보는 팔자를 고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놀보는 자신도 제비를 후리러 나가 일부러 다리를 망가뜨린 뒤 고쳐주어 날려 보낸다. 놀보에게 돌아온 제비 역시 박씨를 물어다 주었으나, 그 박에서 나온 것은 궤짝이 아니라 왈패들이었다. 그들은 놀보를 나무에 매달아 곤장을 치고 놀보는 그렇게 패가망신한다. 널리 알려진 흥보가의 이야기는 대략 이와 같다.
흥보가는 적어도 18세기부터 판소리 형태로 불려왔다. 제비가 흥보에게 보은할 박씨를 물고 날아드는 ‘제비노정기’ 대목은 판소리 한바탕 중 가장 중요한 대목, 이른바 눈대목으로 지칭된다.1) ‘제비노정기’는 제비가 중국 강남에서부터 요동, 의주, 그리고 서울과 경기를 두루 거쳐 전라도까지 날아 내려오는 장면을 담았다. 비행하는 제비의 시선을 그려낸 것이므로 색채의 표현이 다채롭고 풍경 묘사 역시 풍성하다.
강종길은 ‘제비노정기’를 전시의 모티브로 삼았고 여기에는 몇 가지 층위가 존재한다. 작가는 어린 시절 국악을 배웠다. 그렇기에 판소리 서사와 친숙했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작업에 도입하게 되었다. 더불어 강종길은 2021년부터 풍경이라는 소재에 천착해 왔는데, 특히 풍경을 풍경 그 자체로 담아내고 싶다는, 단지 시각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소리와 음향 등 청각적인 측면 또한 담아내고 싶다는 고민을 지니고 있었다. 풍경을 소리로 표현한 극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널리 불려 온 판소리의 눈대목이라는 점에서 ‘제비노정기’는 작가의 경험과 관심이 하나로 얽힌 일종의 교차 지점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늘을 내달리는 제비의 시선을 사변할 때 풍경은 사라지고 만다. 비행하는 새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는 뭉뚱그려지고 흩어진 끝에 분별할 수 없이 뒤섞인 상태가 되어, 풍경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속도에 가까운 무엇으로 현현하는 것이다. ‘제비노정기’ 속 제비가 바라보는 풍경을 상상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속도를 상상하는 것과 같고, 따라서 풍경은 표현되기보다는 돌이킬 수 없이 해체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강종길은 원래부터 풍경을 ‘제대로’ 그려낼 생각이 없었다.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을 하나의 화면에 맞아들인다는 작가의 목표는 일종의 불가능성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강종길의 회화에서 대상은 필연적으로 추상화되곤 했다. 형태가 분해되고 마침내 속도만 남게 되는 그러한 상태는 강종길이 그려내고자 하는 풍경과 오히려 가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의아한 점이 있다면, 작가의 회화가 그러면서도 추상으로 완전히 나아가진 않는다는 점이다. 전시에는 구상 혹은 추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상에 가까운 것, 그리고 추상에 가까운 것이 고루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 있는 것은 구상 혹은 추상이 아니라 일종의 진자 운동이다. 대상에서 출발하지만 추상에 가까워지는, 그렇지만 그렇게 추상화된 뒤에도 다시 한번 구상으로 되돌아가는, 그렇게 구상에도 추상에도 완전히 머물지 않는 일시적인 진자 운동. 강종길에게 있어 풍경을 ‘제대로’ 그린다는 건 이러한 운동의 역량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언어를 빌리자면, 예술의 임무는 형태를 발명하거나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포획하는 것에 있다.2) 안 소바냐르그(Anne Sauvagnargues)는 들뢰즈의 이 정식을 조금 더 분석적으로 해설한다. 이는 형태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며, 형태 너머의 힘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거부해야 하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미리 주어진 형태’다. 형태란 결과적으로 힘들의 관계로 구성되는 것이기에, 형태를 나타낼 때에도 그것이 힘들의 관계이자 생성이라는 점을 드러낼 수 있다면 예술의 임무는 수행될 수 있다. 반면 형태를 비판하거나 이의 제기한다고 하더라도, 힘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임무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3)
“그림을 그린다는 건 붙잡으려는 게 아니다.” 강종길이 운문 형식으로 남긴 작가 노트 중 이와 같은 말이 있었다. “놓치고, 흘려보내고, 그 남은 걸 손바닥에 문지르는 일이다.” 4) 풍경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화가가 풍경을 그릴 때, 그 그림은 세계가 아니라 풍경을 그린 또 다른 그림을 더욱 닮게 된다. 오늘날 동시대 회화의 참여자들은 구상을 그리는 데 만족할 수 없지만, 추상을 한다고 하여 급진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강종길의 회화를 ‘진자 운동’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 운동은 구상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추상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어떠한 종류의 회화적 공식을 모방할 수도 없고 이의 제기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일종의 가능 공간을 찾으려는 운동에 가까울 것이다. 무언가를 붙잡아야 한다는 ‘미리 주어진’ 생각을 포기하고, 남은 것을 문지르며 무엇이 남아 있는가 감각하는 것이다.
‘제비노정기’가 다름 아닌 판소리 눈대목이라는 점에 재차 주목해 본다. 강종길과의 대화에서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5) 소리를 할 때 소리꾼은 가락과 박자를 이끌고, 고수는 그것을 따라가며 전체적인 흐름을 맞추어 나간다는 것이었다. 판소리가 오직 소리꾼의 소리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에 고수의 역할과 그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북을 치는 고수의 밀고 당김 또한 소리를 나타나게 하는 데에 일조한다.6)
이것을 두고, 판소리가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여럿의 주체가 관계 맺으며 함께 소리 내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말한다면, 그건 지나친 비약이 되어버릴 것 같다. 하지만 판소리에서 소리꾼과 고수가 함께 소리를 만들어내며, 소리가 두 주체의 움직임 사이에 귀속된다는 점은 분명한 듯 보인다. 주체가 흐려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진자 운동 속에서 소리는 나타난다. ‘제비노정기’가 이번 전시의 바탕이 된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 소리가 이러한 진자 운동을 암시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풍경과 속도, 추상과 구상, 서사와 이미지, 판소리와 회화, 그리고 서구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 사이 어딘가에서, 그 사이를 오가는 운동이 계속해서 벌어지는 것이다.
강종길은 내게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가 쓴 『인간과 말(Der Mensch und das Wort)』(1955/2013)을 읽어볼 것을 권했다. 나는 책을 읽으며 피카르트가 소리에 관해 쓴 몇 가지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소리는 자유롭게 부유한다. 마치 하늘과 지상 사이의 공간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 공간을 온전히 가득 채우며 하늘과 지상을 연결한다. 음악에 의해서 공간은 무한이 된다. (…) 노래가 인간에게 온다. 노래는 인간에게서 외부로 흘러나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로 흘러들어가는 것에 가깝다.”7)
텍스트의 선험성은 현대적 예술의 공리 중 하나로 거론된다. 말해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이미 말해졌기에 주체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세계를 그리고자 할 때에도 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그린 다른 그림을 모방하게 된다. 이러한 선험성은 오늘날 바깥이 상실되었다는 공통 감각과 공명하면서, 말하거나 그리는 주체가 완전히 제한되어 버렸다는 또 다른 감각을 발생시키는 듯하다. 하지만 피카르트는 그러한 선험성을 무한함으로 다시 읽는다. 풍경은 이미 있고 화가는 그것을 그린다. 풍경이 화가의 내부로 흘러 들어갈 때, “자유롭게 부유”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은 “무한이 된다.”
강종길은 풍경을 그리며 판소리 서사를 그리지만, 동시에 풍경이 아닌 것을 그리며 판소리 서사가 아닌 것을 그린다. 추상과 구상, 서사와 이미지, 청각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 그리고 서구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 사이에 머물며 그림을 그린다.
- 김석배, 「흥보가 《제비노정기》의 전승양상」, 『문화와 융합』(23), 2001, 189쪽.
-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하태환 옮김, 민음사, 2008, 69쪽.
- 안 소바냐르그, 『들뢰즈와 예술』, 이정하 옮김, 열화당, 2009, 70-71쪽.
- 강종길, 작가 노트.
- 강종길과의 대화, 작가의 작업실, 2025년 8월 5일.
- 이 내용에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작가의 이야기를 왜곡한 나의 착오다.
- 막스 피카르트, 『인간과 말』,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2013, 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