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라고 쓰고서, (사이라는 괄호를 치고), 보기라고 쓰기
김규현
Kim Kyuhyun
2026 / 08 / 27 - 2026 / 10 / 03
읽기라고 쓰고서, (사이라는 괄호를 치고), 보기라고 쓰기
라흰 조은영 큐레이터
Ⅰ. 삶의 시간이 그림이 될 때
“눈이 녹으면 그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라고 물은 이는 셰익스피어였다. 물질의 세계에서 눈은 응당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이 화두는 흰빛이 비록 형태를 잃을지라도 그 감각이 어쩌면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넌지시 비춘다. 부재의 공간으로 은거한 흰빛이 보는 이의 시선과 기억, 상상을 거쳐 다른 형태로 다시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인즉 흰빛을 실어 나르는 것은 인간의 시선이고 기억이며 상상이다. 이러한 논지는 김규현의 작업 세계를 조망하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그의 회화에서도 휘발되기 쉬운 일상의 찰나가 수동적으로 옮겨지기보다, 작가의 응시와 기억, 내면의 질문들을 관통하며 새로운 실재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김규현에게 그림이 되는 것은 자체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삶의 한 장면’이 기억과 감각을 지나 색과 빛의 형태로 다시 맺히는 순간이다.
여기서 ‘삶의 한 장면’이란 극적인 순간이나 의도적으로 수집한 모티프와는 다른, 일상의 접면에서 작가가 마주한 대상과 시간이 회화적 감각으로 재인식된 상태에 가깝다. 그리고 이렇게 발견된 장면들, 가령 산책길의 하늘과 강, 친구들과 둘러앉은 식탁, 책과 메모가 놓인 테이블 등은 작가가 통과해 온 시간과 응시의 자리를 보여주는 각기 다른 진입로로서 캔버스에 나타난다. 달리 말하면 김규현의 인물과 정물, 풍경은 장르의 구분에 따라 나뉘기보다, 일상의 여러 접면들이 시선의 깊이와 거리감을 달리하며 회화 언어로 재구성된 결과라 할 수 있다.
한편 2023년부터 김규현은 작업의 비중을 풍경으로 한층 옮겨 왔는데, 이는 주변을 소요하거나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근경의 사물과 얼굴에 머물던 시선이 먼 거리의 강과 나무, 빛과 공기로 향한 결과다. 그런데 시선의 거리가 변하는 일은 단순히 대상이 바뀌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떠한 감각의 질서로 화면에 재구성되는가의 문제를 수반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김규현의 작업은 무엇을 그렸는가의 범주를 넘어, 하나의 장면이 어떠한 감각적 변용을 거쳐 회화 언어로 정립되는가의 문제로 접어든다.
Ⅱ. 번역된 풍경과 회화적 현실
이번 개인전 《읽기라고 쓰고서, (사이라는 괄호를 치고), 보기라고 쓰기》는 실경과 기록, 기억과 회화가 하나의 풍경에서 출발하면서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성립하는 양상을 다룬다. 이는 작업 과정에서 수집된 사진과 메모, 그리고 이를 조형적으로 재구성한 드로잉과 수채화의 관계성에서 분명해진다. 그는 이 매체들을 실제 풍경에 귀속되는 위계적 과정으로 보지 않는다. 이들은 찰나의 인상과 단서를 저마다의 고유한 결로 보존하며 각각 독자적인 풍경을 이루고, 회화 역시 그 기록을 경유하여 또 다른 상태로 성립한다는 점에서 예외는 아닌 까닭이다. 이처럼 하나의 감각적 원천이 서로 다른 조형적 국면으로 분기되는 양상은 김규현이 작업의 관건으로 짚은 ‘번역’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가 말하는 ‘번역’은 실제로 감각한 장면을 회화의 언어로 옮기는 과정을 뜻한다. 이는 또한 원본을 충실하게 복원하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본 것과 기억된 것, 그려진 것 사이의 차이를 회화의 조건으로 삼는 일에 가깝다. 다시 말해 김규현은 대상의 원본성을 되찾는 것보다, 풍경이 캔버스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축적되는 잔상과 변형의 궤적을 짚어내는 데에 무게를 싣는것이다. ‘읽기’와 ‘보기’ 사이에 괄호를 배치한 이번 전시의 제목도 이 같은 작가의 인식에서 비롯됐다. ‘읽기’가 화면의 조형적 단서를 따라 시간과 맥락을 짚는 일이라면, ‘보기’는 색과 빛, 거리감으로 구축된 풍경을 감각하는 일일 터이다. 이때 관객은 두 흐름 사이, 곧 ‘(사이)’의 영역에 머무르며 기록과 기억, 화면의 상(像)이 완전히 포개지지 않는 틈을 마주하게 된다.
김규현의 이러한 인식은 2023년 작 〈Atelier Walks (Ilmpark)〉를 기점으로 보다 분명한 형식을 얻은 바 있다. 이 작품은 산책길의 정경과 이를 옮긴 이미지, 작업실의 이젤과 캔버스를 한 화면에 중첩함으로써, 관찰에서 제작으로 이어지는 시간성을 가시화하고 풍경이 그림이 되는 과정을 되비춘다. 이처럼 관조와 수집에서 착상에 이르는, 말하자면 회화적 수순을 입체적으로 포섭한 이 방식은 “이 경험이 왜 회화로 만들어져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질문의 목적이 사진이나 영상과 구별되는 회화의 본질을 확증하는 데에 있지는 않았는데, 이는 경험을 재현하는 행위의 당위와 여기서 새로이 촉발되는 조형적 사건을 지속해서 묻는 과정 자체가 그의 회화를 이끄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Ⅲ. 표면 이후의 색과 공간
이 같은 탐문은 특히 근작의 조형적 질서를 재편하는 형식적 전환을 통해 가시화되고 있다. 과거 김규현은 붓질과 드로잉 선, 메모, 화면의 가장자리, 테이프 자국 등을 드러내 표면의 문법을 구성하곤 했다. 반면 근작에서 이 요소들은 묽은 색층으로 스며들거나 흐릿한 흔적으로 남는데, 이는 작가의 의식이 표면에 노출된 구조에서 화면 내부로 파고드는 깊이와 공간의 영역으로 옮겨간 결과다. 환언하자면 본 전시에서 그의 작업을 진경으로 만드는 것은, 구체적인 풍경의 형태가 아니라 빛과 색, 습도와 거리감, 그리고 그곳에서 보낸 시간의 감각인 셈이다.
김규현이 조성하는 이 같은 회화적 공간은 우선 색의 밀도와 상호작용으로 성립된다. 그의 화면은 특정 색으로 시선을 깊이 이끌다가도 또 다른 색층으로 지각을 표면 위에 부유하게 하는데, 이러한 시각적 깊이의 진폭은 풍경에 고유한 거리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색과 공기, 시간이 한 화면 안에 함께 체류하도록 한다. 또한 이번 출품작들에서 종종 관찰되는, 중첩된 색면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은 강물과 땅의 경계라는 실경의 흔적에 기인하면서도, 획의 굵기와 궤적, 끊어짐과 잇닿음을 달리하며 화면의 리듬과 공간감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그러나 김규현의 화면에서 돌올하게 떠오르는 아우라는 색과 선의 조형적 작용뿐만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어디에서 멈출지를 가늠하는 제작의 태도에도 크게 빚지고 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본 전시에서 ‘너무 많은 말을 한꺼번에 하지 않는 그림’을 지향하는데, 이러한 절제와 비움은 회화의 언어가 더욱 천천히, 선명하게 다가서도록 불필요한 설명을 거두는 일이다. “모든 그림이 관객에게 의미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자각은 그러한 도약의 계기였다. 기존 작업에서 눈에 띄던 메모와 문장, 테이프 자국 등이 이제는 필요한 만큼만 남거나 색 아래에서 어른거리는 맥락 또한 여기에 연유한다.
한편 그의 정제된 표현의 기저에는 물감을 천에 스미게 하고 닦아내어 말리기를 반복하는 정교한 축적의 과정이 놓여 있다. 이는 미리 조색된 색을 도포하기보다, 옅은 시간의 켜들을 포개어 하나의 색처럼 발현되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 동일한 장소를 계절과 시간을 달리하며 거듭 응시했던 기억이 입혀질 때, 마침내 화면은 시간의 중첩이 빚은 깊이를 얻는다. 그 깊이가 이렇듯 더함과 덜어냄이 교차하는 가운데 형성된다는 점에서, 지워진 자리와 망설임의 흔적은 미완의 징후가 아닌, 화면이 견딘 선택과 유보의 시간을 긍정하는 자국이라 할 수 있다.
Ⅳ. 읽기에서 보기로, 가까움에서 어둠으로
지하에서 3층으로 이어지는 라흰 공간 특유의 수직적 흐름은 삶의 한순간이 그림으로 번역되어 색과 빛, 깊이의 감각으로 확장되는 이 여정을 선명히 가시화하고 있다. 우선 선묘가 돋보이는 지하층의 작업들은 자연의 장면이 선과 화면의 구조로 번역되는 출발점이자, 이후 전개될 색과 빛의 화면을 다지는 기틀이 된다. 뒤이어 1층에서는 풍경의 흔적이 선과 윤곽으로 남은 작업과, 형태가 옅은 색면을 따라 번지는 듯한 화면이 함께 놓인다. 이는 지각 가능한 형상이 빛과 공기가 빚어내는 비물질적인 감각에 점차 가까워지는 양상이라 하겠는데, 풍경의 명암과 밀도가 이렇게 다시금 조율되면서, 관객의 시선은 재현된 상을 식별하는 일에서 벗어나 화면에 내재된 색과 깊이의 결을 짚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선과 언어(메모)의 흔적은 2층에 이르러 점차 옅어지고, 화면의 중심은 색과 빛, 겹겹의 색층으로 옮겨간다. 이와 같이 장소의 구체성이 휘발된 자리에서 관객은 색이 자아낸 공기를 감각하며, 옅은 색층 사이로 풍경이 천천히 드러나는 순간에 머무른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지각의 전환은 마지막 층에서 완성된다. 자연광을 머금은 3층 공간에 밤의 정경이 드리워지며 ‘보는 일의 조건’을 한층 근원적으로 되묻는 까닭이다. 밤은 형태를 충분히 보여주지 않는다. 눈앞의 정보가 단편적인 만큼, 보이지 않는 영역은 그 장소에 대한 앎과 경험, 어둠을 헤치며 더듬은 감각으로 채워짐으로써 회화적 풍경을 획득한다. 이를테면 밤 산책 중에 마주한 나무와 숲은 뚜렷한 윤곽이 아닌, 어둠의 깊이와 공기의 밀도, 짙은 색면에 스민 미세한 차이를 통해 감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규현의 밤 풍경은 가시적 형태가 희미해진 자리를 암흑으로 걸어가는 기억과 감각으로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전시 전반에 걸친 ‘읽기와 보기의 관계’를 가장 응축된 형태로 드러낸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화면이 머금은 정적과 옅은 색의 호흡 사이로 삶의 한 장면이 다시 떠오를 때, 김규현의 풍경은 대상의 지표적 기록에 머물지 않고 기억과 감각을 거쳐 다시 바라본 풍경으로 화면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