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나랜스
Homo Narrans
노상호, 이영욱, 정영호
Noh Sangho, Yi Younguk, Jeong Youngho
2024 / 12 / 19 - 2025 / 01 / 18
호모 나랜스
라흰 조은영 큐레이터
기술적 진입 장벽을 무너뜨린 정보의 빅뱅은 ‘이야기하기’와 ‘경청’에 필요한 인간의 주의를 점차 파편화하고 있다. 정보의 쓰나미 앞에서 우리의 내면이 이처럼 (서사의 길이가 없는) 순간적인 감각과 최신성 (recency)으로 과부화되는 이유는 정보의 본질이 곧 ‘놀라움의 자극’에 있는 까닭이다.1) 더구나 시간적인 폭을 축소시키는 정보는 어떠한 내용이 형성되기도 전에 서사가 증발되어 버리는, ‘이야기의 위기’를 초래하고 만다. 그런데 유인원이었던 우리가 생존을 위해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이 된 서사적 동물, 이른바 ‘호모 나랜스 (Homo Narrans)’라 하여도 지나침이 없다는 점으로 볼 때, 이와 같은 서사의 위기는 존재를 덮치는 곤경의 총체가 아닐 수 없다. 내러티브를 자양분으로 삼고 삶의 형식을 서사적으로 실현해온 우리는 스스로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귀를 기울이면서 삶의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한편 뇌가 사건을 특정한 서사 구조로 분류하며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이유는 자아정체성을 보존하여 외부 세계에 잘 대처하는 데에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과 관점, 경험이 바뀌더라도, 뇌는 재구성된 기억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자아와 서사를 형성하는 것이다.2) 그렇다면 상기의 맥락에서 볼 때, 현실이 정보화되고 데이터화됨으로써 현존 경험을 약화시키는 오늘의 과잉활동성 안에서는 이야기를 세우고 마주하며 각자의 서사를 탐색하는 과제가 저마다에게 더욱 절실히 주어진다고 하겠다. 전시 《호모 나랜스》는 이렇듯 이야기의 위기라는 난맥상에 노출된 형국에서 자기를 보존하면서도 동시대의 이야기를 찾으려는 어떤 증언의 양상을 포착하고자 기획되었다. 이를테면 본 전시에서 우리는 (서사를 이루지 못하는) 정보와 데이터, 부스러기 같은 순간들이 참여 작가들의 머릿속을 어떻게 스치는지, 이러한 현상을 당면함으로써 이들은 삶에 대해 어떠한 작도와 이야기를 하는지 살펴본다. 더불어 전시는 관객이 각자의 서사를 만들고 인식을 증진할 수 있는 감각을 작품을 매개로 모색할 수 있도록, 이야기의 위기라는 거친 낯섦에 가로막힌 우리를 논의의 장으로 초대하고자 한다.
# 노상호
노상호의 작업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서사의 위기가 작품의 분명한 기저를 이룬다. 이야기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순간적인 이미지만을 소비하려는 현대의 풍광이 그의 작품 전반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보건대 노상호는 디지털 환경에서 이미지가 유포되는 방식을 고민하기 시작한 2016년부터 이러한 태도를 표면화한 듯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의 간극, 양자를 오가는 기묘한 찰나와 감각을 포착하고자 했는데, 그와 같은 시도는 본 전시에 출품된 ‘The Great Chapbook’과 ‘Holy’ 시리즈에서 잘 드러난다. 전자는 가상에 흩뿌려진 이미지들을 매일 수집하여 이를 먹지 위에 수채로 그린 드로잉으로, 그는 이 결과물들을 자신의 SNS에 올린 후 큰 화면에 그간의 드로잉들을 모아 회화로 그려낸다. 반면 ‘Holy’는 디지털에서 모은 이미지를 AI 생성기에 업로드하는 과정을 거쳐 제작된다. AI가 이미지를 묘사한 텍스트를 프로그램에 입력하여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생성하다 보면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이미지에서 현실의 물리를 위배한 오류인 글리칭 (glitching)이 엉뚱하게 나타나는데, 작가는 이를 조합한 화면을 유화나 수채, 에어브러쉬로 묘사하는 것이다.
노상호의 그림은 이렇듯 서사를 내장하는 것과는 무관한 쪽이지만, 그럼에도 본 전시가 그의 작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작가가 정보의 빅뱅에 노출된 가운데에서도 ‘의식의 결과’로서 나름의 자아를 건설하려 하는 까닭이다. 이는 작품에 드러난 ‘얇은 태도’와 ‘글리칭’으로 구체화된다. 먼저 얇은 태도란 이를테면 (The Great Chapbook의 제작 과정이 보여주듯) 정보들이 그 자신이라는 얇은 존재를 통해 쏟아지듯 들어왔다가, 작가를 매개로 다시 가상에 퍼지는 프로세스에 기인한다. ‘얇고 투명한 존재’의 느낌은 먹지를 대고 그리거나 레이어가 비치게 하는 방식, 글로스 바니쉬로 투명도를 높이는 마감법에도 빚지고 있다. 또한 노상호는 글리칭으로 인해 이질적인 환기력이 작업을 비집고 들어설 때, 이를 ‘기적 (holy) 체험’처럼 불현듯 느끼게 되는 감각에 주목한다. 예컨대 ‘Holy’ 시리즈에서 엉뚱한 곳에 위치하거나 불 속에서도 모양을 유지하는 풍선과 눈사람 이미지들은 다른 세상이 불러낸 미지로 느껴지는데, 이를 의식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을 바라보며 양쪽을 오가는 위치에 있음을 스스로가 명확히 인지하기 때문이다. ‘Holy’ 작업에서 그가 약간의 간격을 두고 잉크를 분사하는 에어브러쉬 기법을 주로 사용하는 것도 정확한 신체성을 담보로 하는 아날로그와 마우스 커서 등 다른 매개물을 거쳐야만 닿을 수 있는 디지털 사이의 틈을 은유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기실 노상호는 ‘그림을 그리는 신체’로써 사고하는 자아를 힘주어 강조하는 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횡단하는 작금의 현실과 그 간극이 초래하는 감각을 즉물적으로 옮겨낸 그의 회화는 늘어나는 자극의 홍수 앞에서 둔해지는 의식의 힘을 관객으로 하여금 지속해서 추동케 한다.
# 이영욱
이영욱에게 그림은 말할 수 없는 것을 시각화하고,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게 만드는 언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새로운 언어의 대오를 탐구하며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모색하던 작가의 이러한 소통의 전개에 어느 순간부터 ‘형상의 반복성’이 보태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영욱은 패턴 작업을 시도한 2018년부터 특정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화면에 그리다가, 에어브러쉬를 통해 이미지를 한층 부드럽고 유연하게 연결하면서도 이전보다 강한 연속성을 주는 방향으로 작업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근작에 이르러 그는 예상을 배반하는 ‘조작된 형태’를 확장하면서 반복과 변주를 구사하기 시작하는데, 본 전시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이러한 작업에는 이미지들이 불편을 무릅쓰고 결합된 개조와 병치의 느낌이 화면 안에 섞여 있다. 작가에 따르면 그가 이렇듯 이미지들이 서로 응전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패턴을 기괴하게 조작하는 이유는 현대 사회의 단면에 접촉해 있는 자신의 모습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토로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본 전시에서 작가는 기존의 반복적인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구작에서는 최대한 배제했었던 서사의 음영을 작업을 통해 산출해내고 있다.
이영욱의 관심사는 특히 소비적인 일상어들로 가득한 그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로운 맥락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있다. 가령 본 전시에 출품된 ‘코를 슬쩍 만지는 사람의 초상’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묘한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상대가 자신을 보지 않을 때 몰래 코를 만지는 친구를 묘사한 그림으로, 자극과 유희를 가로지르는 이영욱의 서사를 잘 드러낸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가 이처럼 자극적인 내용을 담는 이유는 그를 둘러싼 일상이 (때로는 이를 무덤덤하게 넘길 만큼) 말초적인 흥분에 도취된 까닭이다. 추측건대 그것은 본 전시가 문제로 삼았던, 내면의 착란을 일으키는 미디어 소비의 급증과도 무관하지 않을 테다. 그러므로 이영욱은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불안정한 건축적 구도’ 안에 배치하는 이합집산을 시도하여, 그러한 세계 안에서 외부와 자신을 연결하고 자기의 위치를 그림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이는 얼핏 뇌가 파편처럼 나뉜 삶의 조각들을 편집하고 사건을 특정한 서사 구조로 분류함으로써, ‘기억의 집합’으로서의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이영욱의 작품이 체계적인 반복의 형식 안에서도 그의 사적이고도 내밀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하는 연유는 이와 같은 제작 배경과 조형성에 있을 테다. 그의 이미지와 자기만의 감정선이 일방향의 행선으로 규정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영욱은 이처럼 ‘나와 주변에 대한 편집된 이야기’로 작업의 피부를 열면서 자신을 꾸밈없이 반영한 모습이 무엇인지 인식의 폭을 넓게 펼쳐나간다.
# 정영호
기술의 물신화라고 새삼스럽게 논하는 것이 이제는 다소 고루할 만큼 우리 시대는 기술 일변도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관통되고 있다. 내면성을 점차 소거하는 이러한 현재의 조류 안에서 서사와 정서의 기미를 탐지하는 일은 특히 현실의 불완전한 조각을 담는 사진에서 (여타의 매체들보다) 복잡한 문제다. 사진이 주어진 현실을 서사적으로 내면화하지 못한다는 견해는 이를테면 벤야민의 지배적인 논조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영호는 사진의 형식이 지닌 역치를 극복하기 위해 조형적인 실험에 모종의 맥락을 결합하여, 물질로 프린트되는 사진의 유효성을 모색하고 사진이 세계와 시선을 교환할 수 있는 고유의 피부 감각을 갖기를 꾀한다. 그러한 콘텍스트의 맥락에서 보았을 때 그의 지난 작업들은 가치 체계의 바탕이 되는 환경이 기술로 인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추적함으로써, 기술이 감각을, 감각이 생각을 바꾸는 시대의 지형을 탐색했다고 하겠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시대 감각과 정서가 발화되는 양상에 점차 집중하게 되었는데, 그의 시리즈 중 ‘Double Retina’ (2023~) 작업들을 발전시킨 이번 전시 작품에서는 작가 자신과 동시대인들의 정서에 관한 이야기가 보다 선명하게 구체화되고 있다.
정영호의 <더블 레티나>는 두 방향의 사진들로 구성된다. 일상을 촬영한 흑백 필름 사진과, 소셜미디어의 GUI나 생성 이미지 혹은 해외 보도사진을 스마트폰 화면에 띄워 픽셀이 드러나도록 접사 촬영한 사진이 그것이다. 그리고 본 전시에서 그는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축을 유지하면서도, 스토리보드의 철판 프레임 안에서 두 종류의 사진이 서로의 본질을 보전하면서 마주하도록 통합한다. 그럼으로써 그의 작업에는 스크린과 내 눈앞의 현실 사이의 공백감이 진동하게 되고, 이 불가피한 틈으로 인해 발생하는, 형용하기 어려운 현기증 같은 감정의 뒤척임이 공백의 너비만큼 채워진다. 또한 작가는 인터넷 밈에서 텍스트가 이미지와 함께 자주 사용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각 작업의 내용과 관련된 문구를 철판에 새겨 화면이 가상에서 쏟아지는 밈의 형식처럼 보이게 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기술이 존재함으로써 가능한 이야기와 조형적인 실험이라는 점에서, (기술로 건설된) 화면 안의 세계와 현실의 미묘한 동행이라는 구조로부터 우리의 인식 체계가 얼마나 연약하게 동요되는지를 체감케 한다. 환언하자면 정영호의 사진은 화면 안과 밖의 세계가 마주하는 지점에, 더 정확히는 이 지점과 순간을 발생시키는 현장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술과 정보들이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현재의 실물 앞에서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할 때 우리 동시대인들에게 표출되는, 위협감과 무력감 등의 정서는 그의 작업에 이렇게 고스란히 체류하고 있다.
- 한병철, 『서사의 위기』 (다산북스, 2023), 22-23.
- 그레고리 번스, 『나라는 착각』, 홍우진 역 (흐름출판, 2024), 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