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표면 너머의 울림을 향하여


정현 / 미술비평, 인하대 조형예술학과 교수


이강욱의 회화는 주제를 지시하는 대상이 불분명하다. 대신 그 공간은 점과 선 그리고 면이 마치 유기체처럼 서로 엉키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어떠한 상황 또는 현상으로 지속된다. 이는 무엇이라 구체적으로 명명하기 어렵기에 “식별 불가능한 지대”로 부르기로 하자. 식별 불가능성은 현대미술에서 자주 언급되는 개념 중 하나로 철학자 들뢰즈(Deleuze)에 따르면 “변신이 일어나는 지대”1) 이기도 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식별 불가능성은 대상의 인식과 그것의 재현 사이에서의 모호함을 가리키는데, 대상의 잠재성과 현실 사이의 간극으로 볼 수도 있겠다. 비유하자면 변기를 애초부터 설정된 기능으로만 인식하는 것과 그 대상의 관례적인 위치와 쓰임새를 변경함으로써 생각하지 못 한 잠재성을 발견한 뒤샹의 흥미로운 게임을 떠올려도 좋겠다.

 

우리는 흔히 그림이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리기와 말하기, 또는 쓰기의 목적이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마치 글과 그림이 소통이라는 목표를 공유하는 다른 형태의 몸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실 모든 언어는 소통을 목표로 하지만, 실제로 언어를 소유한다는 것은 지식과 권력을 지향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림은 오랫동안 이러한 지식과 권력의 요구를 충실히 재현하는 기술로 여겨졌다. 요컨대 그림(picture)에서 회화(painting)로의 진화는 그리기의 다양한 목표와 의미를 제시하였다. 그림이 말 그대로 주어진 미학적 요구에 맞는 형식미를 추구했다면, 회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잠재성을 향해 나아갔다. 이때부터 화가들은 재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회화는 상징과 기호에서 벗어나 식별 불가능한 지점을 향하여 나아간다. 메를로-퐁티(Merleau-Ponty)는 세잔이 풍경화라는 장르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 산, 숲의 정서를 감각하도록 해 주었다고 보았고, 푸코(Foucault)는 마네를 통하여 화화 본연의 정체성을 드러냈다고 판단했다. 화가는 필연적으로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 사이를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강욱은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중첩된 세계로 시선을 돌린다. 그의 회화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존재 대신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와 분자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주목한다. 존재가 형상(image)이나 인물(figure)이 아닌 단백질과 핵산 등으로 이루어진 모든 생물체의 기본 구조이자 활동의 단위를 주목한 것이다.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은 철학과 과학 그리고 예술이 공유하는 지점이다. 이강욱이 생물학적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행위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존재의 본질을 물, 불, 흙, 공기와 같은 원소에서 발견하려는 의지를 견지한다. 초기작 Another World-The Plant (1998-2000)는 작업의 기점으로 볼 수 있는 원초적이고 생물학적인 형태와 질감으로 충만하다. 이러한 유기체적인 세계는 조금 더 확대되어 형상의 흔적이 흐려지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이때부터 점·선·면의 조형언어가 불쑥 생성되기 시작한다. 조금 더 가까이 작업을 들여다보면, 잎사귀나 쌀알을 연상시키는 형태들의 집합체가 화면 위에 좁쌀처럼 흩뿌려진 바탕 사이에 크고 작은 원형이 마치 공명이나 파문을 일으키는 것을 연상시킨다. 마치 우주선, 항공기, 선박의 이동경로를 표시하는 궤적을 연상시키는 Invisible Space(2004-2010) 시리즈는 세포의 생성과 소멸 과정이 펼쳐지는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유기체적인 형태에서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선의 흐름을 생성시킨다. 이처럼 이강욱의 회화를 구성하는 기본은 세포로 부를 수 있는 조형적 원소인데, 그래서 기호도 상징도 아닌 이 조형적 원소들은 선사적(prehitoric)으로 다가온다. 미술비평가이자 기획자인 루시 리파드(Ludcy R. Lippard)는 “복잡한 지구에 사는 우리와는 달리, 인공물 오락거리가 거의 없던 시대에 하늘과 땅 사이에 살던 사람들은 자연의 힘과 현상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2)며 자연과 문화가 맺는 상호성을 강조하였다. 이강욱이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를 관찰하는 행위는 과학기술의 덕분이지만 결국 그가 발견한 것은 우주를 구성하는 원소와 원리에 더 가깝기에 그의 회화는 자연과 문화/문명이 교차하는 세계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강욱에게 회화 공간은 미시세계들이 모여 거대한 갤럭시가 형성되는 “배양의 터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갤럭시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른바 현대회화의 등장은 이미지 이전에 물질의 존재를 주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잭슨 폴록(J.Pollock)의 액션페인팅은 물감 덩어리들이 흩뿌려진 상태로 화가의 행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 매우 즉물적인 현장성을 드러낸다. 미술사는 이를 두고 재현과 의미에서 벗어나 회화의 원형성을 찾아가는 실험으로 미해석한다. 추상표현주의 회화는 색채의 질료들이 캔버스 위로 켜켜이 쌓이는 누적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한편 이강욱의 식별 불가능한 모호한 미시세계는 화면 안에서 반복적으로 증식하면서 지층을 형성하는데, 이는 추상표현주의의 물질성과는 상이하게 펼쳐진다. 왜냐하면 이강욱은 미시세계를 그린 후에 흰색의 반투명 물감을 덧칠함으로써 존재를 희미하게 지워버린다. 여기에서 회화는 표면 아래 심연으로 잠영한다. 다시 한번 메를로-퐁티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수영장의 푸른색을 두고 그 색의 본질을 질문한다. 과연 그것이 물 자체의 색인지, 아니면 수영장 벽과 바닥에 칠해진 푸른색의 배음(倍音)인지를 말이다. 그렇게 화가의 시선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사이에서 색의 공명, 세계의 울림을 되찾는다. 흥미롭게도 이강욱은 자신의 회화를 두고“백색 회화”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백색 회화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백색 회화는 자신만의 암호로 채워진 이 세계의 의미를 풀어낼 수 있는 하나의 단서일 수도 있겠다. 따라서 식별 불가능한 모호한 형체들과 표피의 장식성은 분명 무언가를 가리거나 위장하기 위한 미학적 장치라는 합리적인 의문도 가능하다. 비정형적인 형체를 그리고, 다시 지우고, 되찾는 역설의 과정은 어떤 작가라도 회피할 수 없는 더듬거리는 과정이자 동시에 다양한 역동이 일어나는 갈등과 환희가 교차하는 시간일 것이다. 아마도 이강욱은 이 같은 노정을 통하여 사회가 만들어낸 존재의 조건들- 명성, 형상, 겉모습, 언어, 제스처, 관습 등-로 표면화되지만, 그 본질은 아마도 보이면서 보이지 않는 어떤 여운이나 흔적으로 다가오는 ‘배음’에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1. 이찬웅, 『들뢰즈, 괴물의 사유』, 이학사, 2020, 11쪽
  2. 루시 리파드, 『오버레이』, 현실문화, 2019, 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