괄호에 숨표 찍기
강종길
Kang Jonggil
2024 / 05 / 30 ~ 2024 / 06 / 22
풍경의 유사형태
임수영 (독립기획자, 미술사학자)
색을 특정할 수 없는 핑크빛 표면으로 이루어진 강종길의 평면 신작은 물감의 농도, 그림의 채도, 붓질의 굵기와 방향성이 구성하는 리듬이 소소하게 변주된 한 편의 거대한 연작으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작가가 개별 작품에 부여한 묘사적 제목은 이런 간편한 그룹화(grouping)를 유쾌하게 부정한다. 예컨대 <날아간 공>은 어떤 물체의 움직임을 상기시키지만, <주름진 연기의 템포>는 관객의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기도 한다. 작품 앞에서 우리는 부유하는 기체인 연기는 어떻게 세월 흐름이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름질 수 있는지, 또 그것의 리듬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고, <바삭한 거품>을 통해선 솜털같이 푹신하고 보드라운 거품이 내는 바삭한 소리는 대체 어떤 것일까 묻게 된다.
작품과 제목의 의도된 (불)일치를 통해 강종길은 그가 일상에서 발견하는 사소한 어긋남을 관객도 일시적으로나마 경험하게끔 한다. 작가 노트에서 밝히듯이 그는 “규칙 속에서 불규칙을 발견하거나 불규칙의 규칙을 찾아내는 것”에 흥미를 두고 모순적 상황에 주목함으로써 “관심을 갖지 않으면 사소해지는 것, 혹은 모르고 지나갈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 존재감을 부여해 왔다.[1] 역설적이게도 균일함 속에 가려져 있는 일종의 ‘틈’을 쫓는 작가의 시선은 자칫 진부해 보일 수 있는 자연을 담은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이 제시되지 않은 채 단순히 ‘풍경’으로 불리는 회화 연작에서 우리는 투명한 물가 주변으로 무성하게 자란 풀이나 그 위로 드리운 나뭇가지들을 마주한다. 지극히 평온하고 목가적으로 보이는 이 일련의 고정된 장면 속 질서를 무심히 흔들고 지나가며 부드럽게 균열 내는 것은 다름 아닌 바람이다. 돈모로 밀도 있게 채색한 표면을 갈모로 수차례 반복한 붓질에서 바람의 미세한 움직임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기 위한 작가의 섬세함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풍경 작업을 진행할 때 단편적으로 시각적 현상을 사진으로 촬영하는 대신, 영상으로 기록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을 총체적으로 경험하는데 집중한다.
그렇다면 이 공감각적인 경험은 어떻게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될 수 있을까? 살갗을 스치는 서늘한 공기의 흐름과 연약한 잎사귀들이 바람에 의해 만들어내는 웅장한 소리가 존재한 찰나의 순간을 총체적 감각 기관인 피부로 덮는다면? 그런데 그 피부가 인간의 것이 아닌 돼지와 같은 동물의 피부로 덮인다면? 이렇듯 표현의 욕구에서 방법론적인 질문, 그리고 구체적인 가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구상/추상과 같은 이분법적 개념이나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이행이라는 선형적 흐름을 지양한 채, 풍경과 피부를 포개는 흥미로운 방식을 취한다. 두 상이한 요소가 화면 속에서 겹치면서 관객인 우리는 결국 비인간적 존재의 피부를 통해 감각되고 왜곡된 풍경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김혜순의 시 「피어라 돼지」는 돼지의 고결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자 희생에 대한 진혼으로, 현대 사회 속에서 희생되고 소비되는 동물을 다룬다.[2] 구제역으로 인해 돼지들이 생매장되는 현장이 주요한 계기로 작동했지만 작가에 의하면 이 시는 결국 사람의 몸이든, 동물의 몸이든 결국 몸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라고 설명한다. 덧붙여 “내 시는 몸속에서 나오는 시다. 몸속에서 언어를 굴리고 있다가 꺼내 쓴 것이다”라고 고백한다.[3] 어쩌면 같은 맥락에서 강종길은 풍경 위에 동물의 피부를 덮고, 또 그 위에 신체가 만들어 내는 소리, 즉 구음을 포개어 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시 말해, 이번 전시에 포함된 작품들을 관통하는 요소는 대상으로서의 풍경이 아닌, 그 풍경 안에서 감각하는 몸,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몸인 것이다. 이 점에서 <시김새> 연작과 함께 스피커를 통해 송출되는 사운드 작업 <추임새>는 구체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근육의 떨림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소리를 만들어 악기를 흉내 내거나 장면을 묘사하는 구음 시나위를 화살표, 선, 점, 물결 등의 기호로 표시한 시김새가 전면화된 회화 연작은 일종의 악보로 작동해, 연주자의 감흥과 감정이 담긴(그러나 편집된) 목소리로 다시 표현된다. <추임새>는 전시를 극화하는 연출적 요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풍경-몸-소리-기호를 압축하고 있는 작품에 순환성을 시사하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소리를 회화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물론 20세기 동안 많은 작가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시도되어 왔지만, 주로 음악의 구조와 요소를 시각적인 언어로 변형 또는 치환하는 방식에 머물렀다. 예를 들어 파울 클레(Paul Klee)는 음악의 멜로디를 선(line)으로 구현한다던가 리듬의 시간성을 회화로 번역하고자 노력하며 바흐의 대위법에 영감을 받은 기하학적 추상화 <폴리포니>(1932) 등을 완성했고, 재즈 부흥기에 활동했던 스튜어트 데이비스(Stuart Davis)와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은 각각 <스윙 풍경>(1938)과 <브로드웨이 부기 우기>(1942-43) 등을 통해 즉흥성을 회화적 구성으로 표현했다. 바질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그 누구보다도 음악적, 회화적 경험의 ‘공감감적 표현’이 추상회화의 나아갈 길이라 굳게 믿고 미술 색채가 지닌 고유의 질서로 음악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강종길의 작업은 이렇듯 예술 장르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새로운 표현 방법을 고민해 왔던 작가들의 실험과 궤를 같이하지만, 각기 다른 물질성을 지닌 회화와 소리를 순환하는 방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둔다.
이론가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는 음악과 회화의 연관성을 다룬 글에서 두 분야의 예술은 ‘유사형태(pseudomorphosis)’의 방법으로 서로를 향한다고 주장한다.[4] 이는 표면적으로 서로를 비슷하게 닮아가는 것과는 다르다. 광물학에서는 ‘가정(假晶)’으로 해석되는 pseudomorphosis는 광물이 어떤 영향에 의해 그 내부구조에 따른 본래의 결정형과는 다른 결정형을 나타내는 현상을 지칭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표면적 유사성을 갖고 있는 두 개체가 지닌 구조적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형태의 유사함과 구조적 차이가 공존하는 이 현상은 결국 “예술은 모순 속에서 결합한다”는 아도르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음악에서 미술로의 변모나 소리에서 회화로의 변형이 아닌, 예술의 결합을 추구할 때 마주하게 되는 모순을 순환의 구조를 통해 소통하는 이번 전시를 기꺼이 경험해 보고 귀 기울여 듣고, 충분히 눈에 담아 보자.
- 강종길, 「작업노트」, 2024.
- 김혜순, 『피어라 돼지』서울: 문학과지성사, 2016.
- 손영옥, 김혜순 인터뷰, 국민일보, 2016. 3. 14.
- Theodor Adorno, “On Some Relationships Between Music and Painting”, trans. Susan Gillespie, The Musical Quarterly, vol. 79, no. 1 (Spring 1995), p.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