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러니 Miscellany


나혜원 & 변진

Hyewon Na & Jin Jiweon Byun


2024 / 01 / 25 ~ 2024 / 03 / 09

Miscellany


조은영 (라흰갤러리 큐레이터)


심부재언 (心不在焉)이면 시이불견 (視而不見)이라고 한다.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성현의 말처럼, 어떤 대상을 깊이 느끼려면 그만큼 오롯한 통찰력과 식견이 필요한 법이다. 일상의 흔적들이 그러한 것은 더더욱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삶으로부터 묻어나는 신변 소재들은 남이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감각하여 독창적인 의미를 부여할 때에 비로소 가치를 얻는 까닭이다. 그런데 우리는 서정과 지성에 토대를 두고 이처럼 예리한 식견으로 일상의 체험에 상상력을 동원하는 모범적인 형식을 문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소한 것들을 헤아리는 섬세함으로 창작자의 체험을 드러내어 타자의 공감을 일으키는 이 장르는 바로 미셀러니 (Miscellany, 경수필)이다. 본 전시는 이와 같이 ‘자기를 쓰는’ 수필적 발상과 형식을 통해 현실을 의미화하고 일상성을 일상성으로 극복하는 나혜원과 변진 두 작가의 시선을 담는다.


혹자는 수필의 성격을 논할 때 살아가는 이야기를 ‘붓 가는 대로, 신변잡기식’으로 기록한 글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는 본 전시의 참여 작가들이 보여주는 ‘수필적 발상과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진정한 의미의 수필은 가까운 대상으로부터 존재 이유와 가치를 생각하고, 그것과 나의 관계를 관조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하며, 그러한 사색의 결정에 담긴 진정성과 개성으로 독자의 내면에 울림을 주는 글이기 때문이다. [1] 그와 같은 수필의 본질을 고려할 때, 나혜원과 변진의 작업은 마치 한 폭의 ‘수필화’처럼, 자조 (自照)하는 자세로 스스로를 문학화하는 서정을 풍긴다. 가령 수필이 자아와 타자,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국면을 1인칭의 화법으로 다루듯이, 이들 또한 내면에서 출발한 ‘나의 이야기’를 작가인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아 전달하고 있다. 더불어 수필에서는 이러한 작가의 이야기가 마치 나비효과처럼 독자의 이야기로 전환 (또는 확산)되는 ‘의미화’가 벌어지는데, 나혜원과 변진 또한 그들 삶의 태도가 지닌 진정성으로 관객의 공명과 동감을 자아낸다.


한편 자기 체험을 글감으로 삼는 수필은 누구나 겪을 수 있을 것 같은 일상의 이야기를 얼마나 신선하게 문학화하는지에 따라 작품성이 결정되곤 한다. 따라서 수필적 발상의 관건은 관조와 상상을 본질로 삼아 사고를 전환하여, 감추어진 듯하면서도 살짝 비쳐 보이고, 보이는 것 같지만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심상을 삶으로부터 잔잔하게 길어내는 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두 참여 작가들은 작업의 소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머물게 하지 않고 사실 차원의 체험을 열린 눈으로 표현함으로써, 상기의 가치를 시각 예술의 맥락 안에서 분명하게 구현해냈다고 하겠다. 이를테면 밤 한 톨에서도 모종의 섭리를 깨닫듯이, 이들은 체험성을 담보로 경탄과 사색의 깊이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미셀러니》는 이렇듯 삶의 이야기를 나름의 렌즈에 맞춰 그려내는 나혜원과 변진의 작업을 조명하여, 그들이 풍부한 반향을 지닌 그림의 힘으로 어떻게 관객 앞에 진지한 삶을 불러들이는지 살펴본다. 


# 마음의 빗살들 - 나혜원


나혜원의 작업은 삶을 채우는 평범한 소재와 인물들을 다루면서도, 눈에 보이는 사실의 역 (逆)에 준하는, 대상의 이면도 꿰뚫어 보는 듯하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대상들이 적막한 화면 사이에 습기처럼 스며들면서, 그의 작업에는 공기 중에 노상 감도는 미심쩍은 감각 사이로 모호한 정황들이 자리를 잡는 까닭이다. 나혜원의 작업이 넌지시 드러내는 이러한 내용은 작가 개인이 얽힌 곡절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이동이 잦았던 생활 탓에 양자 사이에 끼인 유랑자의 자아를 형성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연과 애매한 상황이 연속되던 중에 나혜원은 예술을 통해 그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자 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처했던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불명확했던 순간들이 오히려 입체적인 소재로 승화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특히 불안정한 시점에 작가의 내면에서 짧지만 강하게 일어났던 친밀감이나, 그가 떠도는 와중에 찰나적으로나마 막역한 관계를 맺었던 대상들은 작가로 하여금 그러한 인연과 정서에 가려진 뒷면을 반추하도록 만들었다. 나혜원이 밀접한 영역 안에서 포착되는, 동요하는 마음의 빗살들을 탐구하는 까닭은 위와 같은 배경에 있다.


상술하였듯 나혜원은 가족, 친구와 연인 또는 공간 등 그가 몸을 부대끼며 친밀한 관계를 맺는 모든 것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여기서 교착되는 양가적이고 불온한 감정을 건드려본다. 이러한 심리상태는 대개 친밀함의 이면에 그늘처럼 따라붙는 유약함과 잔혹성, 미성숙함 등이 주를 이룬다. 본 전시에서 작가가 자주 다루는 정물과 인물은 의도가 배제된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그가 인연을 맺은 대상들로, 작가는 그들과의 조우가 남긴 복합적인 인상을 재구성하여 작업에 남기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작가가 대상과의 상호 작용에서 벌어지는 긴장이나 감정적 충동을 정직하게 포착하기 위해 무의식 속으로 침하하기를 자꾸만 꾀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그의 작업에는 잠든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잠의 그림자가 모델의 초상에 드리울수록, 그의 얼굴 위를 헤매는 작가의 시선 또한 무의식의 심연으로 오롯이 가라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깊은 잠에 빠진 모습은 친밀함의 표피에 머물던 취약함을 숨김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나혜원의 작업 세계에 더없이 적합한 소재이기도 하다.

 

어쩌면 친밀한 관계의 배후에서 양가적인 맥락을 읽는 것이 때로는 부끄럽고 사사롭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무의식을 간솔하게 끄집어낸 작업으로 내면을 용기 있게 표출함으로써, 관객과의 진실한 소통을 고민하는 삶의 태도를 취하기로 한다. 나혜원의 수필적 발상은 사적인 이야기를 이처럼 거짓 없이 용기 있게 발언하여 그것의 공적인 울림을 확장한다는 데에서 빛을 발한다. 그리고 물감에 오일을 다량 섞어 이미지를 수채화처럼 번지게 하는 작업 과정은 그러한 발상을 실물로 구현하는 중요한 요건이 된다. 흐르는 레이어를 쌓고 말리기를 수차례 반복하다 보면 작은 터치 하나에도 운동성과 시간성이 가감 없이 발현되고, 덕분에 관객은 작가의 시선이 얽힌 진솔한 결과를 그림을 매개로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말마따나 일상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예술 행위란 신변잡기식의 일기가 아닌 외부로의 발언이므로, 나를 드러내는 용기와 진실이 담긴 말의 무게, 바람직한 삶에 관해 내면의 확실성을 갖추는 것은 나혜원의 회화에서 내용이나 형식에 앞서는 제일의 과제다. 나혜원의 작업은 이렇듯 삶으로부터 고뇌하며 여과된 진정성으로 주변의 대상을 파악하며, 감정의 양면성을 파고드는 자신의 심적인 나상 (裸像)이 (외형적인 치장 없이도) 그 자신과 ‘그와 같은’ 수많은 타자들에게 빛살처럼 다다르기를 도모하고 있다. 


# 교량으로서의 회화 - 변진


‘예술가의 창작이란 그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전언은 어쩌면 변진의 작업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수식일지도 모른다. 나혜원과 마찬가지로 변진 또한 이동이 많았던 삶의 이력으로 인해 어디에서나 제자리가 아닌 듯한 불안을 겪었고, 이는 예술의 힘으로 삶의 복잡한 기호를 해독하여 깊은 내면에 도달하려는 의지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변진의 작업에서 이러한 의욕은 타인들 속에 얽섞인 자신의 자그마한 존재를 타당하고 필연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지구상의 작은 단면을 고작 한시적으로나마 차지할 뿐이기에, 온전히 내 것이며 주체적인 소우주를 개척하는 일은 변진에게 유달리 실존적인 과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마치 수필이 그러하듯 혼자만의 시간을 약속하는 일상을 말없이 오래 응시하면서, 그와 ‘그가 속한 곳’이 맞닿을 때 발생하는 심리적 반향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작가는 장소와 머무름, 소속과 일탈, 기거하는 공간에서 빚어지는 내적인 마찰 등을 작업에 옮김으로써, 흔들림 없는 실존을 위한 정신의 지표를 찾고자 한다.


변진은 이렇듯 특정 장소에 머물며 경험했던 찰나의 순간과 분위기를 추상적으로 재구성하고, 그것이 긴 시간의 간극을 초월하여 관객에게 전달되기를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작가에 의하면 그의 발을 잡는 일상의 공간을 탐미적으로 관찰하고 정직하게 기록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존재의 역사를 세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변진의 회화는 일상에서 포착되는 모든 상 (像)들을 소재로 삼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시각 요소들을 규합한 그의 그림이 물리적인 세계와 작가의 자아 사이에서 일종의 ‘교량’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말인즉 변진의 회화는 자체로서 고유한 존재가 되어 창작자와 세계 사이의 상호 작용을 이끈다. 이는 회화가 현실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과 맞닿아 있다. 가령 작가가 특정 장면이나 공간을 묘사한다고 해서 그림이 그러한 장소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회화는 이로부터 추출한 시각 요소들이 현실의 ‘흔적’을 남기고 화면에 재편됨으로써, 하나의 독자적인 존재로 자립하지 않는가. 


변진의 작업에 드러나는 단적인 특징들은 그가 이처럼 일상의 자국이 기록된 그림을 매개로 자아와 삶이 선순환적으로 소통하기를 모색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다루는 재료와 작업 방식은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삶의 자취를 남길 수 있는 재료라면 무엇이든 활용해 ‘만들기 놀이’를 하듯 회화를 구성하고, 눈앞의 대상을 이렇게 손과 눈으로 더듬는 과정으로 내면의 반응을 직감적으로 토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종잇조각과 천, 비닐, 방충망 등을 그림에 이어 붙이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고, 주재료인 물감도 색과 질감, 접착성의 맥락으로 접근한다. 또한 이렇게 완성된 작업에서 뚜렷한 인물이나 내러티브를 찾기 힘들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는 화면의 (보이지 않는) 바깥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음을 암시하며, 그러한 시선과 현실 사이의 유기적인 교류가 바로 작업의 주제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변진은 완성과 함께 그의 손을 떠난 그림이 존재감을 지닌 독립된 개체가 되어, 소속감과 삶의 터전, 장소와의 관계를 맺는 문제 등에 대해 자신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쌍방향으로 소통할 수 있기를 지향한다. 사사로운 체험을 극적인 장치보다는 관조와 고백적인 통찰로 다룸으로써, 예술이라는 대용물로 자기 삶의 깊이를 더하는 일이 과연 작가만의 몫이 아님을 관객에게 일깨우는 것이다. 잡념으로 치부될 수 있는 내용까지 흡사 수필을 쓰듯 정신의 영역에 접목하는 일은 물론 무료한 시간의 갈피를 넘기는 노릇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변진은 지극히 사적인 부분이 예술로 환원되고 그것이 일상의 특별한 광채로 되돌아오는 이 변증법적인 구조에서 작업의 길을 찾으며, 삶의 작은 조각들을 집요하게 붙들어 본다.



  1. 최원현, 『좋은 수필 쓰기와 좋은 수필 바르게 읽기』 (한국문학방송.com, 2016), 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