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보이 휘슬
서원미
Seo Wonmi
2023 / 09 / 21 ~ 2023 / 10 / 28
말들의 여정
라흰갤러리 큐레이터 조은영
인간은 창조적인 상상을 형상화하며 이야기를 즐기는 동물 (Homo fictus)이다. 직립 보행을 하면서부터 인간은 눈빛과 몸짓, 그리고 흡사 짐승의 소리와 같은 단말마적인 말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문자가 없던 시절의 인류는 유희가 아닌 생존을 위해 이야기를 배웠는데, 이때 그들에게 주어진 공유 방법은 곧 ‘말’과 ‘기억’이었다. 기억을 잃어버리면 어김없이 죽음이 뒤따랐으므로, 인류는 각자의 사연을 말하고 때로는 도구로 그림을 그리기를 반복하며 기억을 강화했던 것이다. 더욱이 들숨과 날숨의 교환이 없다면 말은 발화되지 않으므로, 되풀이하거니와 말은 숨이자 생명이요 기억은 생명의 저장고였다.(1) 발화하는 순간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말의 결점을 보완하고자 문자가 발명된 것은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이야기라 함은 우리가 상상력을 발휘해 말로 건설한 세상이며, 말과 이미지는 이 세계를 축조하는 전부라고 하여도 지나침이 없다. 입에서 밀려 나오는 말이 소설과 영화의 내러티브보다 훨씬 넓은 범위를 갖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서원미의 이번 개인전 《카우보이 휘슬》은 바로 이처럼 말로 하는 스토리에 방점을 두는, ‘말을 좇는’ 그림들의 향연과도 같다.
# 은막 뒤의 말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행위는 특정 매체를 통해 나름의 구조를 갖춤으로 하여 타인의 정서적 반응을 유도하는 기술이다. 서원미의 《카우보이 휘슬》도 그러한 맥락과 궤를 같이 한다. 작가는 21세기의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전하는 이야기를 (입이 매체였던) 말의 시대라는 렌즈를 통과하여 보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종국에는 모종의 심리적 기제를 가동하기 때문이다. 다만 작가는 그를 둘러싼 서사나 역사적인 사건을 되씹으며 캔버스에 술회를 옮겼던 과거의 작업과 달리, 이제는 지상에서의 모든 현상을 열린 비유로 감지하여 실제와 꿈의 몽타주를 더듬는 이미지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실현할 무대를 화폭에 구축하기 위해서는 상기한 바와 같이 문자나 영상보다 풍요롭고 울림이 많은 매체가 필요했을 터이다. 서원미는 그래서 ‘말’에 모험을 걸어보기로 했다. 이를테면 그는 말에 담긴 힘이나 말 (word)과 말 (horse)의 의미를 오가는 양가적인 리듬을 하나의 요소로서 화면에 올리는데, 이와 같은 사고의 맹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는 바로 전시명에서 드러나는 ‘카우보이 휘슬’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부 영화의 신화 탓인지, 우리는 ‘카우보이’를 상상할 때 황혼을 배경으로 점점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나 말을 타고 채찍질하는 평원의 총잡이를 곧잘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이 낭만적인 장면을 여는 것은 우리의 주인공이 그의 말을 불러들이는 ‘카우보이 휘슬’이다. 이러한 연출과 제스처는 자못 신파적으로 다가오지만, 그럼에도 서원미가 이 행위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말 (horse)을 호출하는 데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휘슬은 말 (word)의 파동을 목구멍에 고이게 한 다음 이 울림을 뇌에 전달함으로써, 외마디 음성으로 이야깃거리를 생성하고 그것이 상상을 부추기던 말의 시대의 근원적인 스파크를 일순 예감케 한다. 환언하자면 서원미는 카우보이 휘슬을 매개로 그의 작업에 말을 불러들이고, 공기를 헤치며 유영하는 말에 손을 맡겨 미지의 이미지를 탐색하며, 그러한 이미지로 구현되는 이야기로써 보는 이의 심상에 불을 지피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말은 곧 이미지를 찾아 감지하게 하는 제일의 수단이다. 그래서인지 서원미의 근래의 작업에서 모태와도 같은 말은 작가의 기억으로부터 먼 변방으로 떠밀린 부분과 머릿속의 제멋대로인 잡음까지 돌진하듯 누비며, 이를 생생한 이미지로 사로잡아 그의 망막에 새긴다. 작가의 작품에서 전도양양한 기운으로 꿈틀거리는 말이 자주 발견되는 까닭도 그가 침묵에 잠긴 이미지에 조금씩 다가가 그것의 윤곽을 가늠해보려는 위와 같은 작업의 추동력을 한 필의 말로 시각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 전시에서 작가가 화면의 주요 인물로 다루는 카우보이는 그러한 말을 가장 능숙하게 다루는 몰이꾼이자, 은막 뒤에 도사린 말의 휘장을 걷어 수수께끼처럼 숨겨진 이미지를 노련하게 찾아내는 술래가 된다. 요컨대 그는 카우보이라는 화신의 눈과 귀를 빌려 말의 반향을 헤아리고, 잠시라도 눈길을 주지 않으면 무형의 것으로 미끄러질 이미지를 말에 힘입어 포착해내는 것이다. 작가와 이미지가 말을 매개로 서로의 심장을 고동치게 할 때까지, 이렇게 쫓고 쫓기기를 반복하는 과정은 작업의 구심이 되는 지점에 숨바꼭질과도 같은 유희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본 전시에서 서원미가 선보이는 ‘숨바꼭질’ 시리즈는 이와 같은 놀이의 비유로 형식에 정신을 불어넣고 감응을 체험케 하는 일련의 작업들이다.
# 진테제 (Synthese)의 실현
서원미의 지난 전작 (全作)을 분석적으로 관찰한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의 작품에서 죽음과 심리적 공황을 둘러싼 지리멸렬한 감정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불안을 감각하는 서사는 그의 작업 세계에서 물론 중요한 축을 형성해왔다. 그렇지만 생사에 관한 그늘진 정서는 이번 ‘숨바꼭질’ 연작에서 인식의 가장자리로 잠시 물러나 있다. 작가가 《카우보이 휘슬》을 통해 이르고자 하는 길에는 그의 작업에서 언제나 목적이자 동인이었으며 또 과거의 여러 시리즈들을 한 궤에 몰리게 했던, ‘자체로서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확고히 자리하는 까닭이다. 짐작건대 그림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작가를 에워싸던 판단과 작용은 서원미 특유의 기습하듯 시선을 불시에 사로잡는 형식과 소재에 이따금씩 가려지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우보이 휘슬》에서 작가는 그의 모든 작품 저변을 관통해왔던 그림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를 캔버스 표면 위로 다시금 범람케 만든다.
그림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서원미의 이야기란 앞서 상술한, 파리한 환영에 불과했던 이미지를 예리하게 더듬는 행위에서 도입부를 찾는다. 그러나 이 플롯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은 구축과 소멸, 드러내는 것과 지우는 것이 있은 후에 더욱 단단해지는 정점 (頂點)의 과정이다. 주지하다시피 서원미는 역사화의 언어를 테제로 삼은 ‘페이싱’과 ‘블랙커튼’ 시리즈를 그의 초기작에서 진행하다가, 질서와 규율로부터 해방되어 긴장을 해소할 ‘안티테제’를 도모하고자 ‘카니발헤드’ 연작을 뒤이어 시작한 바 있다. 축제와 센세이션, 육체의 반란을 요점으로 하는 ‘카니발헤드’ 시리즈에서 작가는 뒤섞인 착종과 휘황한 색채, 우연마저 집어삼키는 해체의 형식을 참으로 마음껏 분출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육제 (肉祭)의 격정은 그림 고유의 무구함과 성질을 담기에는 너무나 숙명적인 아이러니를 내포했는데, 그것은 제한된 소재 탓에 형식마저 부득불 규정지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서원미는 형식과 내용 면에서 제약에 갇힌 그림을 구해낼 방도로서 그의 새로운 ‘숨바꼭질’ 연작을 꾀한다. 이 작품들에서는 기실 감각을 건드리는 모든 것에 열린 소재와 여기에 가변적으로 수반되는 갖가지 이미지들이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자유로운 유희를 즐긴다. 또한 작가는 ‘카니발헤드’에서 허물고 무너뜨린 후 남은 잔여물이나 이전 작업에서 유래된 요소들을 매만지며, 그것들을 새로운 합 (合)으로 재형성하고 있다. 모순을 극복하고 정과 반을 넘어서는 이 작업은 달리 말하면 ‘진테제 (Synthese)’의 성찰과 실현에 가깝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서 작가가 몰두한 것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아닌, 대상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세간의 모든 이야기가 나름의 설정과 역할에 따라 톤을 달리한다는 맥락을 작업에 반영했다. 가령 서원미는 이미지를 찾아 나서는 이 모험담에서, 카우보이와 말의 눈에 비친 풍경을 각개 시선의 미묘한 차이에 따라 때로는 묘사적으로, 때로는 뭉개듯 나타내며 이야기의 부피와 양감을 거푸 늘려나간다. 더불어 그는 숨바꼭질에서 술래가 세는 숫자들을 일종의 추상적인 요소로 화면에 수놓거나, 어지럽게 어우러진 가운데에서도 내러티브를 보조하는 조연들의 면면이 각자의 목소리를 높이도록 연출함으로써, 그의 그림이 매번 새로운 시야의 그물로 대상을 감싸도록 만든다. 붓을 운용할 때 한 박자 호흡을 건너뛰어 더욱 두드러지는 조형적인 터치와 캔버스 곳곳에 흩뿌려지는 낯선 신비감 또한 이야기의 분위기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기법이다. 하지만 작가에 의하면 상기의 결과물은 그림에 휘둘리며 들쑥날쑥하게 토해낸 감정의 소산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격랑처럼 밀어닥치는 에너지와 순발력을 자제하고, 모든 감각을 그림의 내면에 쏟아내며 착상을 얻을 때까지 이를 긴 시간 오래 응시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림에 관한) 그의 이야기의 결미를 향하는 이 단계로부터 강력하면서도 꿈결처럼 말랑한 정서적 체험을 일으키는데, 여기서 작가와 관객의 가슴에 아릿하게 각인되는 이 감정은 다름 아닌 과거를 경유하는 노스탤지어이다.
# 존재감의 축도
감정에의 몰입을 통해 상대의 마음을 열고 존재를 확장시키는 것이 이야기의 주요한 기능임을 고려할 때, 서원미가 작업으로 환기하려는, 망각을 가르고 기원을 향수하는 노스탤지어는 유달리 높은 전염성으로 관객에게 심연의 물결을 일으킨다. 노스탤지어는 소멸된 실재로 돌아갈 수 없기에 발생하는 괴로움인데, 이는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서 강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현재의 시간과 실존을 도리어 고찰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김홍중, 『사회학적 파상력』 (문학동네, 2016), 135-139.
서원미는 이와 같은 멜랑콜리의 시각적인 효과를 작업에 동원하여 그것의 여음이 공기 중에 머무르게 한다. 작가가 그의 이야기의 주요 인물로 카우보이를 내세우게 된 또 다른 이유도 카우보이가 불러일으키는 함축적인 의미들 가운데에 언제나 비애가 감도는 노스탤지어가 자리하기 때문이었다. 이 로맨틱한 영웅이 지평선의 소실점을 향해 사라질 때 관객의 내면에는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으리라는 침묵의 파토스가 범람하지만, 카우보이가 남긴 아우라는 오히려 그가 멀어짐으로써 우리에게 더욱 가까워지지 않던가.
하지만 서원미의 작품은 레테 (망각)의 강물에서 곧 포말로 부서질 과거의 시간을 붙잡아 그림이 어떤 근원을 향한 그리움이 될 때 비로소 이 서정의 궁극이 된다. 말하자면 그의 작업은 결핍된 기억의 대치물로 종종 기능하며 지나간 시간과 어떤 원천 속으로 우리를 겹겹이 포개고 있다. 예컨대 몇몇 작품들에서 그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과 그 시절을 살았던 빛바랜 인물들을 그림으로써 과거를 현재적으로 느끼게 한다.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문명의 축복을 받지 못한 태고의 시간까지 노스탤지어를 확장하여, 최초의 스토리텔링으로 꼽히는 동굴벽화의 투박하지만 이글거리는 조형 언어를 추적한다는 사실이다. 서원미가 재창조한 동굴벽화에서는 과연 알타미라나 라스코의 그것만큼이나 두드러지는 자연주의적인 표현과 조형성, 땅을 구르는 힘이 교차하는 빛과 어둠을 뚫고 검은 형체를 드러낸다. 그런데 동굴벽화의 무드를 동시대로 가져온 이 작품들은 지금까지 논했던 말과 기억, 이미지로 건네는 이야기와 이야기로 가동되는 감정을 하나의 일체로 고스란히 웅변한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동굴벽화는 이미 자체로서 말과 기억으로 이야기를 공유했던 시대의 산물이고, 벽화를 보았던 이들이 들짐승과 용사를 자기 안에서 경험하며 자기를 넘어 존재를 확장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원미는 이렇듯 어떤 집단의 일원으로서 혹은 작가로서 그에게 근원적인 표본이 되는 대상과 시대를 반추하고, 노스탤지어가 구축하는 공감대나 향수의 도달점인 카우보이, 동굴벽화 등의 이미지로부터 이야기의 힘을 빌려 감응을 만발케 한다. 그러나 노스탤지어의 모순에 대해 앞서 논했듯이, 작가가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기억의 파편들을 붙들수록, 더구나 그것이 원초성에 가깝게 표현될수록 이 행위가 외려 반대급부로서 부각하는 것은 작업의 무한정한 변주를 자아내는 서원미의 존재감이다. 관객은 입장도 상황도 어느 것 하나 작가와 같지 않다는 한계를 넘어 《카우보이 휘슬》의 이야기에서 내적인 체험과 동일시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작가의 감정과 존재를 ‘현재 진행형’인 동사로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서원미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도 좋다면 그림은 진정 그에게 존재감의 다른 이름인바, 말을 좇고 이미지를 찾는 이 여정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그래서 현존하는 그의 실재의 다채로운 축도가 한량없이 채워지고 있다.
- 이대영, 『스토리텔링의 역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8), 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