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캐니
류노아 · 이제
Ryu Noah · Leeje
2023 / 08 / 17 - 2023 / 09 / 16
언캐니
라흰갤러리 큐레이터 조은영
생동하는 이 세계가 돌아가는 형편과 갈등에 빠지지 않으면서 외부를 접하고 인식하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내부에서 어떤 확실성에 도달한 힘과 이를 분열시키려는 양극성이 인간 존재의 토대를 이루는 근본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양극적인 긴장은 때로는 분리되다가도 돌연 화합을 청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현상의 원인은 마음의 성질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마음’이란 사실 내 마음이 아니라 바깥에서부터 나에게 작용하는 모든 외부적 조건들이 응집하여 내부화된 소산으로서, 만나는 조건과 마음들에 따라 나의 내면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들이 제각기 다른 주름들로 접히고 펼쳐지는 까닭이다. 그래서 인간의 사명은 마음의 주름들이 일으키는 통합과 분열의 대립을 조화롭게 다루는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내부화된 것들이 간혹 지나간 뒤에도 물러서지 않고 과거에 하던 것을 하던 대로 계속하려고 할 때 마음은 타성적인 성향을 갖기 시작하는데, 마음이 이러한 타성에 젖을수록 우리는 관성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 사물과 점차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특히 부조리의 병을 앓는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는 목마르게 찾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극단들 사이를 뚜렷한 주관도 없이, 굳어진 습성에 따라 그저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난관에 봉착하기 일쑤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미지의 대상을 찾아 방랑하는 바로 이때, 인간의 의식은 익숙한 대상에게서 불현듯 낯설고 두려운 감정에 빠지곤 한다. 본 전시가 인식의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언캐니 (uncanny)’란 바로 이처럼 존재의 근원적인 불가해성을 직면함으로써 일상의 무언가로부터 실감하게 되는 불확실성과 혼란, 불안의 정서를 의미한다.1) 그러나 전시가 탐색하려는 것은 언캐니 개념을 둘러싼 정신분석학적인 맥락에 있지 않다. 《언캐니》는 오히려 삶에 내재된 생소함과 불확실성이 수반하는 불안, 판단의 미결정성에 따른 혼란 등을 참여 작가들이 어떻게 시각화하는지를 살펴보고, 그들이 자각한 낯섦이 이 난해한 독해를 포기하지 않는 작업으로써 어떠한 의미에 도달하는지 조명해보고자 한다.
더불어 본 전시는 ‘나와 생의 섭리’ 또는 ‘완성과 미완성’ 등을 습관적으로 섣불리 구분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작업에서 드러나고 있음을 주목한다. (앞서 언급했던) 내부화된 관성적인 힘에서 이탈하려는 양상을 바로 이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언캐니》에서는 류노아와 이제가 그들이 접한 조건에 대응하며 기존과 다른 내면의 주름들을 만들어내는 작용이 포착된다. 이 행위는 두 작가로 하여금 분리와 대립을 통해 독자적인 길을 찾거나, 안정된 결말을 거부하는 미완의 단계가 도리어 풍부한 자력이 있음을 깨닫게 했다. 예컨대 류노아의 작품들에서는 그가 낯선 감각과 부딪치며 인식의 균열을 경험한 끝에 보다 넓은 세계를 자각하게 된 과정이 순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제는 대상들의 우연한 마주침을 화면에 태동케 함으로써, 그것이 선재된 의미를 벗어나 열린 현재로 승화하도록 감각의 새로운 잣대를 마련한다. 본 전시는 이렇듯 현상으로부터 수수께끼처럼 생경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문턱에서, 필연의 요인을 비껴가려는 능동적인 의지가 광활한 세계의 일부를 캐내고 잠재적인 것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케 하며 관객에게 또 다른 연쇄 반응으로 이어지고 있다.
# 상실과 열림의 기록 – 류노아
《언캐니》에 출품된 류노아의 작업들은 2015년부터 근래에 이르는 작업들을 모두 아우른다. 긴 시간의 간격을 두고 제작된 작품들을 선보이는 만큼, 본 전시에는 작업의 방향을 고민하며 전전했던 작가의 지난 나날들이 작업 너머로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이 작업들은 마치 하나하나의 사이에 깊은 강이 가로놓인 듯이, 형식과 내용의 양 측면에서 모두 괄목할 만한 변화와 성장을 보여준다. 가령 동양화를 공부했던 작가는 장지에 그림을 그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유화를 주재료로 선택하게 되었고, 근작에 이르러서는 점차 유화의 기름의 양을 늘려가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화면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류노아의 작업 세계가 어떤 임계점을 넘어 새로운 경지의 것을 예감하게 된 데에는 독일에서의 생활 중에 그의 몸과 마음 깊숙이 둥지를 틀었던 고통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류노아의 작업에는 외지에서 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수심이 축축하게 흐르고 있었다. 가령 이 시기에 제작된 <Hungry man>, <Prankster> 등은 특히 생존이라는 당면 과제 앞에서 삶을 버텨야 했던 불안과 긴장을 풍긴다. 그보다 앞선 시기의 풍경 작업에서도 일상이 한 조각도 손에 잡히지 않는 듯한 근심이 화면에 감돌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런데 이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감정들을 표현하던 작가는 느닷없는 허리 통증으로 몇 달을 앓아눕게 되면서, (이제껏 실감하지 못했던) 삶을 지배하는 어떤 생경하고도 강한 저류를 직시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간의 순리'였다. 작가는 탄생과 빛나는 순간을 품으면서도 언젠가는 쇠멸을 준비하게 하는 이 비가시적인 시간의 힘을 몸소 체험하면서, 혹자는 한낱 허무로 치부할 인간과 예술의 가치, 창작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 등을 곱씹게 된 것이다. 주목할 것은 그가 시간에 결박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상황에 항거하거나 혹은 그것의 파멸적인 영향 앞에서 타성적으로 도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류노아는 오히려 시간이 초래하는 모순과 분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현존하는 모든 것의 저변에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의 스밈이나, 시간이 초래한 아이러니를 종내 초월해내는 감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둘러싼 위와 같은 작가의 인식은 2020년 이후의 작품들에서 특히 고전주의를 연상시키는 회화 언어로 표현되고 있다. 고대의 모티프를 따른 데스마스크, 주두와 조각은 물론, 실체적인 모델에서 벗어나 이를 개념적으로 여과시킨 인물의 형태, 은은한 파스텔 톤을 사용해 회벽의 프레스코를 연상시키는 화면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요컨대 작가는 지나간 먼 세계의 공기와 구도, 퇴색된 색조를 적용하여, 자신의 작업을 마치 긴 시간에 걸쳐 물려받아 영속되는 유산의 궤에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류노아는 시간의 감각을 온 신경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아득한 것, 오랜 시간을 버티고 남은 것들을 작업의 외피로 두른 후에, 궁극에 가서는 이로부터 불변의 모럴에 접근하기를 꾀한다. 그가 동기를 얻은 고전주의의 정신이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성을 감상자의 세계에서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여기서의 모럴은 시간의 고유 법칙과 더 나아가서는 예술을 통해 존속될, 초시간적으로 유효한 가치에 관한 것임이 뚜렷해진다. 류노아의 작업은 시간의 절대적인 서사에 관객을 편입시키는 데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시야를 전설과 신화의 시간에 상응할 법한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면에는 삶의 ‘언캐니’한 절단면을 손바닥에 만지고서야 시간과 개인의 의미를 선명하게 발견할 수 있었던 상기의 정황이 자리하는바, 이와 같은 점에서 류노아의 작업은 과연 자기 상실과 그것에 뒤이은 열림의 기록에 다름 아니다.
# 공명하는 회화 - 이제
이제의 화면은 마치 안개에 젖은 공백처럼, 눈에 들어온 대상과 공상적인 착상 사이에서 매듭 없는 물결을 모호하게 일으킨다. 붓터치는 빛을 끌어들여 진주층처럼 떨리고 색조 사이로는 질감이 스며드는 가운데, 우두커니 시선을 던지는 인물들은 금방이라도 대기 속으로 사라질 듯 풍경과 시간에 섞여 ‘완결되지 않은 상황’으로 감각되기 때문이다. 환언하자면 작가는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외부로부터 대상의 내면을 두드리며 다가올 미지의 서사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그는 화면이 이처럼 ‘미완인 상태’로 보이도록 여러 장치를 마련하는데, 이를테면 평상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인물의 표정에서 어딘가 미심쩍은 낌새가 드러나는 점이나 곳곳에서 개입하는 우연한 요소들, 거의 추상처럼 구축된 공간 등이 바로 그러하다. 시간이 교차되는 지점에 스며드는 여명 혹은 낙조의 오묘한 농도, 가깝지만 낯설고 문명화와는 거리가 먼 장소들 역시 언제라도 스러질 듯한 감각을 아슬아슬하게 지탱한다.
상기한 바와 같이 이제의 작업은 특정한 사건을 지시하기보다는, 불명확하고 연약한 가상의 시공간으로 의식의 나사를 자꾸만 느슨하게 풀어 버린다. 구체적인 방향성 없이 이렇게 작가와 관객의 마음으로 밀고 들어오는 감정들은 어쩌면 그것이 근원하고 있는 현실이 애당초 공허하고 분별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 정서가 ‘언캐니’의 낯섦을 지나 더 깊은 불안을 향해 관습적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싹을 동반하며 충만한 저력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형상과 색채, 마티에르에 이르는 모든 것이 각개의 요소로서 서로를 어수선하게 절단하지 않고, 무언가 미진한 느낌이 남은 화면 내에서도 그것들이 하나의 합일된 풍경을 이룬다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비롯된다. 시간의 흐름 안에서 하나로 묶인 대상들이 조형적 리듬을 교류하고, 그것들의 합으로 공동의 정서가 마련되는 것이다. 더불어 이제는 직감에 의해 선택한 요소들을 공교롭게 조우하게 만들고 이 마주침으로부터 규칙과 질서를 확립하는데, 이러한 작업 과정은 당초의 순간적인 감각이 화면을 관통하면서 작품이 필연적인 결과를 이탈해 또 다른 연쇄 작용을 양산하도록 이끈다. 투명한 표현과 거친 텍스쳐를 넘나드는 유화 재료가 여러 실험의 여지를 남겨줌으로써 작업이 지닌 미완의 여백을 가능케 한다는 점도 물론 간과할 수 없다.
이제는 이렇듯 은근히 불편하고 어슴푸레한 미완의 작업으로써 관객의 감정이 예측불허의 무늬를 만들어내게 하는데, 그가 이러한 작업을 통해 탈일상적인 감각을 제공하려는 이면에는 ‘회화의 사건을 어떻게 확장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자리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미술이 이미지로서 갖는 힘은 사회사적인 사건에 구체성을 띤 발언을 하는 식으로 현실의 차가운 물을 덮어쓰는 것에 귀결되지 않고, 도리어 현상의 여파를 열린 감각의 상태로 무한히 전환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막연히 흘려버리다가도 불현듯 마음에 차오르는 일상의 반향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정형화된 형상과 색 등의 충돌을 통해) 언캐니가 수반되는 회화로 이 파장을 순환시키고자 한다. 여기서 그가 눈을 돌리려는 현실의 여파란 일상의 대상은 물론이거니와, 특정 사건을 회상할 때 동반되는 몸의 기억이나 정리하기 힘든 양가적이고 희미한 감정들이 특히 주를 이룬다. 물론 바깥으로부터 유래한 자극을 회화만의 개방적인 감각과 사건으로 부단히 순환시키려는 이 과정은 느슨하고 더디며, 기다림을 위한 기다림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붓에 얹어 캔버스 위로 정성껏 실어가기를 얼마, 이제의 회화는 마침내 타성에 젖은 전형을 시험대에 올리며 잠재성의 파동을 공명시키기에 이르고 있다.
- 핼 포스터, 『강박적 아름다움』, 조주연 역 (아트북스, 2018), 22,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