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와 코스모스

김상소,  김정인, 손위혁

Kim Sangso / Kim Jungin / Son Wihyeok  

 


2022 / 12 / 15 - 2023 / 01 / 20

카오스와 코스모스

 

라흰갤러리 큐레이터 조은영

 

보이는 것밖에 볼 줄 모르는 눈이 먼 이들의 세계에서 이 상투적이고 날로 무거워지는 정신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 관습과 전통에 의한 강요는 더이상 자양분이 되지 못하고, 오늘의 우리는 사물과 현상을 보는 관점에 어떻게든 변화를 수용해보려는 추세에 점차 합류하고 있다.(1) 질서의 요소를 포함하면서도 합리성이 깃들어 있는 세계관을 재창출하는 것은 따라서 시대적 요구인 동시에 절실한 창조적 활동이다. 하지만 이 절차는 초기 조건의 혼돈과 민감성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상을 다양하게 창발하며 질서를 찾아 나가는 것이면서도, 고정된 질서나 불변하는 실체를 당초부터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단히 ‘과정 중심’적이다. 또한 스펙트럼을 지나는 빛들이 파장의 차이에 따라 각기 다른 길로 뻗어가듯이, 이것의 변형과 저것의 이형은 단일하지 않다. 여기서 분광 (分光)하는 대상을 질서의 정도에 따라 분류하자면, 한쪽 끝에는 유기체의 조화가 완성된 코스모스가 있고, 다른 쪽의 끝에는 무한한 잠재성으로 충만한 혼돈의 카오스가 자리하게 된다. 본 전시 《카오스와 코스모스》는 이러한 가상의 극단을 설정한 상태에서, 참여 작가들의 작업 세계가 보여주는 파장을 두 개념 사이에 배열하며 더듬어 본다.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패러다임에서 주목할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이것이 고정불변의 구도가 아니라, 수렴과 발산이 순환하는 ‘자기 조직화’의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카오스에도 질서는 잠복하고 있으며, 질서는 언제든지 카오스로 역전될 수 있다.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참여 작가들이 보여주는 화면 또한 개별 조형 요소들이 함께 엮임으로써 (얼핏) 불안정한 운동 형태를 보여주면서도, 창작의 과정을 통해 혼돈으로부터 풍요로운 다양성과 질서를 찾아가고 있다. 말인즉 캔버스 내의 개별 요소들을 제각기 따로 놓고 보았을 때와는 다른, 거시적인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에서는 우주의 메커니즘을 시각화할 수 있는 이러한 존재론을 바탕으로 작가들의 작업을 이해할 수 있는 감상의 범주를 확장해보고자 한다. 무엇이 작가들을 이처럼 낯선 직조와 왜곡으로 이끌었는지를 궁리하고, 그들이 카오스로부터 지각의 변동을 일으키는 현상을 조형성과 내용, 그리고 회화의 매체적 특성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이는 곧 파편들로 이루어진 카오스와 같은 화면 안에서, 감상자가 변화의 실상과 어렴풋한 인과관계를 감지하도록 인도하기 위함이다. 혹자의 눈에는 얼마간 무질서하게 보일 수 있는 형태가 다름 아닌 창조의 추동력으로 흘러갈 수 있음을 파악하는 것은 모호하고 난해해 보이는 작품 세계에 다가갈 수 있는 신선한 접근법으로 다가올 것이다.

 

# 파격의 위의 – 김상소

 

손은 과연 사람의 말과 생각을 따라잡을 수 있는가. 김상소는 사람이 매개물을 통해 전개하는 이야기와 이 내러티브를 담아내는 매체를 탐구하면서, 서사를 둘러싼 공기에 날카로운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이야기의 은밀한 리듬과 하나하나의 구성 요소에서 생기는 파동, 픽션에서 드러나는 모든 특징들을 포착하던 그의 고개 위로는 어떠한 이야기나 캐릭터가 ‘왜 그렇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지’에 관한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고민 끝에 작가는 내러티브의 요소로부터 조형 언어를 찾아내고, 말과 말 혹은 생각과 생각 사이의 공백까지도 울림으로 채울 수 있는 기호를 모색하여 이를 자신의 손끝에서 회화로 재탄생시켰다. 서사를 구성하는 관습을 자유자재로 거느리며, 그것의 무늬를 회화의 테두리 안에서 불균형하고 어긋나게 풀어놓거나 얽어매는 이 작업들은 파격의 은은한 위의와 쾌감을 풍긴다.

 

김상소의 작업이 서사를 갱신하여 이같이 생산적인 카오스를 분만해낼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 주제와 표현을 분리함으로써 그림이 기승전결의 구조나 모사 (模寫)를 탈피했기 때문이다. 가령 그는 특정 이야기와 캐릭터를 자신의 화면에 옮길 때 기존의 것에서 어떤 요소를 도입할 수 있을지 고민한 다음, 내러티브는 소설에서, 색채는 영화로부터 추출하여 프레임 안으로 불러낸다. 뒤이은 절차는 이전의 기능과 의무에서 해방된 조형 요소들에게 새 역할을 부여하고 자유롭게 조율하여 전연 색다른 결과물을 개척하는 작업이다. 캐릭터를 재현하기 위한 조합의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묘사할 대상이 ‘불량한 모범생’이라면, 작가는 그러한 캐릭터를 다루는 데에 자주 쓰이는 형식들을 일련의 데이터로 정리하고 나서 조형과 색채를 골라 작업에 입힌다. 그러고는 결과물이 과연 처음의 의도에 부합하는지 실험을 거듭하는 것이다.

 

김상소가 도달하려는 온전한 스토리를 코스모스의 세계로 비유한다면, 그는 이 이야기의 한 페이지에 적절한 카오스를 도입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서사를 연신 다시 읽게 만드는 매력적인 숨구멍을 열었다. 또한 그는 실체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인 징후들을 긴장감 있게 구성함으로써, 여운과 감각을 가로지르며 모호한 지점을 산출하는 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회화의 에너지라는 사실에 쐐기를 박는다. 다른 매체가 주는 어떠한 향유보다도 더욱 생생한 추체험이 바로 그림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설득하며, 김상소는 이렇듯 서사를 갱신하고 회화의 유산에 싱그러운 호흡을 불어 넣는다.


# 오래된 미래를 도모하며 - 김정인

 

김정인은 무진장한 속도를 과다하게 노출하고 있는 도시의 단면으로부터 아무런 연대성도 없는 공허함을 보았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자신의 영혼을 내면에 숨긴 채 변화에 뒤흔들렸고, 이곳에서 이방인이 된 김정인은 오래전에 잃어버린 낙원을 향한 그리움과 의지를 키웠다. 하지만 타의에 의한 격변을 강제하며 거부권을 행사하기조차 배척하는 권력의 행패 앞에서, 작가는 저항의 길을 개척하는 과업에 작업으로써 어떻게 헌신할 수 있는지를 긴 시간 고뇌해야 했다. 이윽고 번민의 실타래 안에서만 모색하던 것들을 그림에 쏟을 준비가 되었을 때, 그는 자주 배회하던 골목의 균열 사이사이에 습기처럼 배어든 이미지들로부터 망각된 낙원을 캐내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은 그래서 지배의 헤게모니가 홍수처럼 일상을 잠식하는 세태를 디스토피아로 진단하고, 인간이 되돌아가야 할 근원으로 ‘오래된 미래’의 코스모스를 아득히 꿈꾼다. 이때 주목할 점은 소외된 대상들을 망각으로 파묻으려는 제도와 그것에 응전하는 조각난 이미지들의 절박한 상황이, 그의 화폭에서 마치 비에 젖은 듯한 원림 (原林)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김정인의 화면과 물감, 붓질 등을 총체로서 바라볼 때, 그것은 질펀한 흙으로부터 생명이 먼지를 일으키며 소생하는 원시적인 도가니를 떠올리게 한다.

 

예리한 감상자라면 일찌감치 파악했을 터이지만, 앞서 나는 ‘스며드는 물과 습기’의 감각을 의도적으로 힘주어 말했다. 강제가 수반되는 변화의 흐름이 작가에게는 고유의 유동성으로 지반을 불안정하게 하는 액체의 상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액체 (물감)를 담는 그릇인 회화는 ‘액체화의 위기’ 가운데서 힘겹게 코스모스를 견인하려는 김정인에게 가장 적합한 매체이다. 그리고 그는 도래해야 할 질서를 도모하기 위해, 주변에 내팽개쳐지고 이름도 불리지 못한 잉여의 형상과 편린들을 화면에 불러모아 카오스를 조율했다. 이 개별 이미지들은 물밀듯이 쏟아지며 도덕을 이탈시키는 힘을 파악하고, 그것으로 가시화되는 위기에 저항할 결의로 견고하게 겹쳐진다. 연대를 선언하며 한데 응축된 이들의 관계망은 진동하는 힘의 파장을 축축한 표면에 주입하면서 (권력의 주체, 나아가 관객에게도) 쉽게 간파되기를 거부한다. 요컨대 김정인의 작업에서 카오스적인 교란은 지배 체계로부터 재단되지 않기 위한 장치인 셈이다.

 

한편 김정인의 작업은 파편의 실금들이 어떠한 무늬를 그리는지 지켜보면서, 액체성의 입김에 맞서는 이 엉겨 굳은 이미지들의 저항성을 겉면에서부터 물들이고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붓질로 인해 형상들이 서로 유연하게 관계를 맺고, 느리게 덧대는 유화 특유의 작업 방식은 한 획 한 획을 마음에 새기며 목표에 다가가려는 이 태도를 고스란히 이미지에 부여하는 까닭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는 상실된 이상향이 습윤한 도가니에서 다시 싹을 틔울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작품 곳곳에서 형상의 자투리를 붙들며 고정하는 나무나, 뚜렷한 꼭짓점을 매개로 이미지 조각들을 수렴시키는 별 모티프 또한 연대한 이미지들의 인내심 강한 심장을 끝없이 고동치게 만든다. 그리고 예비된 섭리를 치를 때가 과연 머지않았다는 듯이, 김정인의 카오스가 지나간 자리에는 응축된 파편들의 염원이 이내 영원한 것이 되어 찾아들기를 기다리며 고무적인 공기로 화폭에 감돌고 있다.

 

# 감각의 붉은 신호등 - 손위혁


눈에 보이는 현실은 이제 피상적인 껍데기가 아닐까 한다. 마음은 가상 공간의 어떤 일을 향해 연거푸 달려가고, 말초적인 흥밋거리와 빠르게 휘발되는 이미지, 대중의 호기심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정보는 일시에 정신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실제의 극과 네트워크 내에 존재하는 등가의 반대 극 사이에서, 손위혁은 이도 저도 아닌 듯한 존재의 고립을 느끼며 의식의 분열을 일으키는 공상에 잠겼다. 입증되지 않고 쏟아지는 정보들이 판단을 흐리게 하고, 웹상에서 마구잡이로 수집했던 이미지들은 어느 순간 소멸하는 무상함만 남겼던 것이다. 작가에게 막무가내로 부딪쳐오던 이 폭풍같은 행로는 종내에 이르러 궤도를 벗어나 뒤틀리고 고장이 나버린 심상으로 펼쳐졌다. 손위혁은 이와 같이 어긋나고 파편화된 캐릭터의 형상을 그의 작업 세계에서 한껏 삐걱거리게 헝클어버림으로써 카오스의 감각을 유려하게 흩뿌린다.

 

또한 손위혁의 화면은 가상에 존재하는 논리적인 접속 관계를 요령껏 피하면서 질서 아닌 질서를 구축하고 있다. 예컨대 시스템의 과부화가 일어날 때 삼원색이 뚜렷한 픽셀 이미지들이 디스플레이에 마구 드러난다거나, 지각할 수 있는 모습을 갖춘 이미지를 끝없이 확대함으로써 그것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지는 상상을 화폭에 옮기는 식이다. 게다가 구상과 추상 사이의 지점에 균열을 내는 이 돌연한 왜곡은 회화의 본질에 힘입어 어떠한 우회로도 거치지 않은 채 모든 감각을 분출해낸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의 붓질은 시시각각 다른 호흡과 진동을 통해 발현되므로, 회화는 어느 모로 보나 자체로서 이미 왜곡인 까닭이다.


그러나 손위혁의 작업은 오작동으로 빚어진 것 같은 움직임과 무질서로 꿈틀거리면서도, 결코 무작위적인 자극으로 비약하지 않는다. 천진난만하고 다소 우스꽝스럽기도 한 형상의 이면에는 과다한 정보에 노출되는 오늘의 풍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관객에게 고민의 지점을 던져주려는 작가의 의도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말인즉 그는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동요를 순진한 이미지에 묻어둠으로써 감상자를 이 맹랑한 캐릭터에 곧장 매료시키면서도, 보는 이가 그러한 감정에 압도되지 않게 만드는 부정적인 인식의 메커니즘을 동시에 이끌어낸다. 여기서 작가의 원리는 우리의 뇌가 한 가지 감정에 휩쓸리는 현상을 중재함으로써 균형을 찾는다는 ‘귀여운 공격성’의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손위혁은 이렇듯 무질서를 동반한 곱살스러운 형상에 미심쩍은 사회상을 담고, 이러한 이미지가 투과될 안막에는 감각의 붉은 신호등을 켬으로써, 현실이 언젠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마음을 잘근잘근 곱씹고 있다. 그리고 (현실과 가상의) 양자택일 너머로 존재할 다른 차원의 질서를 지향하려는 작가의 끈기 있는 고집 덕분에, 우리는 그의 요구가 많은 경고에 귀를 기울이며 기꺼이 경도된다.



 

 


 1)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관념의 모험』, 오영환 역 (한길사, 1996),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