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pe Out

이페로 개인전 

Epäro


2022 / 11 / 09 ~ 2022 / 12 / 10

도피안의 길

 

라흰갤러리 큐레이터 조은영

 

# 묵계된 섭리

 

우리는 육체의 피상적인 껍데기를 가지고 우주의 질서에 직조되며, 우리와 함께 사라질 필멸의 것들을 긴 생애 내내 궁리하게 되기 마련이다. 생의 근원을 갈망하며 세계와 인간 사이에 묵계된 섭리에 다가가고자 하는 이 기나긴 운명으로 보건대, 인생을 연옥에 빗대는 비유도 과연 지나침은 없다. 이페로는 이처럼 인간이 떠안고 가야 할 고독한 삶의 표피 너머에 있는, 보편적인 ‘모럴’을 궁구해온 작가이다. 오랜 기간 그를 괴롭혀온 불가항력적인 신체의 통증이 살에 박힌 가시처럼 사라지지 않고 ‘생의 본질’의 작은 한 조각만이라도 이해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을 키워온 것이다.

 

열병과도 같은 육체의 반란이 번번이 제동을 가했던 탓에, 이페로는 인생이 고통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기억과 연상을 강도 깊게 체험하게 되었다. 그의 작업 세계 또한 모럴을 교란하였던 통증의 심상을 독자적인 시각 언어로 재현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과물은 아픔에 지친 초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신이자 초월로 빚어낸 삶의 총체로 빛나고 있다. 고통으로부터 튕겨져 나온 이페로의 도피처가 바로 화폭이었으므로, 괴로움을 상쇄할 수 있었던 그림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는 바깥의 모든 것으로부터 초탈하여 오로지 작업을 향한 갈망만을 여일하게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생의 기로에서 일종의 정점 (頂點)을 이룬 정경을 유기적으로 표현하려다 보니, 작가의 관심사는 스스로와 관객에게 ‘치유’의 열쇠를 건네주는 것으로 방향을 겨냥하게 되었다. 음식과 밥상 그리고 이를 매개로 성립되는 관계의 주제가 이페로의 전작 (全作)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까닭은, 작가가 이렇듯 음식으로 섭생하는 생명의 작용을 이해하고 작품을 통해 치유의 섭리를 부여잡고자 했던 데에서 연유한다.


# 달지만 쓰고, 쓰지만 달다.

 

이페로가 그간 꾸준히 다루어온 밥상과 먹거리, 혹은 음식을 먹는 행위의 순간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몸을 건전하게 유지하고자 했던 그의 갈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작가는 ‘생의 본능적인 의지와 욕망’의 대목들을 이와 같은 주제로부터 담아내기 시작했다. 모든 생명체가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생존하고 식욕으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먹기를 통한) 존재의 실존이 또 다른 대상의 ‘먹히는 일’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것임에도, 음식과 먹는 일은 생태의 논리를 뛰어넘어 사유를 감각적으로 유발하고, 꿈틀거리는 욕망이 투영됨으로써 특정한 시공간 안에서 하나의 문화가 되기도 한다. 먹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수의 미디어 매체를 통해 도처에서 조명되는 것을 보면, 먹을거리를 둘러싼 요소들은 과연 삶의 모든 표상이자 본능적 욕망이 뒤엉킨 실타래와 같다.

 

마찬가지로 이페로의 작업은 잘 차려진 음식을 재현하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그의 손을 거친 달콤쌉싸름한 먹거리들은 요리가 되고, 요리는 발효를 거쳐 인간관계의 매듭을 지으며, 종국에는 관객으로 하여금 존재론적인 질서를 탐구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가령 작가는 초기의 작업에서 밥상과 이를 둘러싼 삶의 풍경을 묘사하거나 때로는 먹고 먹히는 쾌락을 조명했으며, 수박 등의 정물을 이용해 선혈이 낭자한 자학적인 고투를 그림으로써 자아를 모색하기도 했다. 요컨대 그는 음식과 맛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삶과 관련된 무한한 화두에 정신의 살을 찌우고 뼈대를 쌓아온 셈이다.


그런데 이처럼 작업의 흐름을 발전시켜나가던 이페로는 이번 전시에서 외려 초기의 작품 형식으로 회귀했다. 밥상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구미를 자극하는 각종 음식들도 감각적으로 풍부한 빛깔을 뽐낸다. 하지만 이와 같은 광경을 비추는 작가의 전등의 촉수가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졌다. 그의 초점은 특정 음식이나 미각을 시각화하는 것에 있지 않다. 또한 과거 그가 욕구와 의지의 기호들을 왕성하게 펼쳐 보인 것과 달리, 이번 신작들은 공기 중에 감도는, 달지만 쓰고 쓰지만 달콤한 욕망의 공기를 자못 진지하게 음미하는 듯하다. 감미로운 것에 유혹된다면 절망의 고비를 맞을 것이고, 쓴 맛을 감내한다면 쾌락의 기쁨은 배가될 터이다. 작가를 이러한 성찰의 위치로 이끈 것은 바로 삶이 무엇인지 알고자 했던 갈증이었다. 그렇지만 곧장 그는 먹거리를 그림으로써 생의 진리에 도달하려는 자신의 욕구가 채워질 수 없는 운명이며, 인간이 짊어진 어떠한 삶의 무게도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자 진리와 욕망과 보편성에 가시적인 형체를 부여하고자 했던 그간의 고뇌가 빠르게 휘발하기 시작했다. 이페로의 작업은 욕망과 의지의 탑을 쌓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인식한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된 힘을 발휘한다.

 

# 마음을 헹구는 일

 

영원한 물음에 관하여 해답을 찾고자 했던 이페로가 욕구의 매듭을 푸는 순간 조화롭고 논리적인 질서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형체를 지우는 작업’을 통해 예비된 섭리와 연결되고자 한다. 가령 작업이 명료한 완성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는 돌연 붓질로 화면을 밀어서 지우고 사람이나 동물의 입에 음식을 한가득 물림으로써 입을 지우며, 입을 없애는 것으로 표정까지 지워버린다. 그리고 형상이 형체 없는 것으로 미끄러지는 이 순간, 강풍을 일으키던 욕망은 부지불식간에 증발된다. 남겨진 것은 생과 사의 굴레에서 제외된 채 마음에 이는 아련한 파문뿐이다. 이페로는 이와 같이 전략적으로 차용한 먹거리의 모티프들을 모조리 휩쓸어 버림으로써, 모든 것이 모호해진 가운데에서 삶의 실체가 오히려 더욱 명료하게 보이는 경지에 들어선다.

 

삶의 실체라 함은 얼핏 추상의 언어로 여겨지기 마련이지만, 작가는 독자적인 장치와 기법을 사용해 이 개념을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한다. 앞서 언급했던, 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음식을 꽉 차게 베어 먹는 캐릭터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가 음식을 입에 무는 행위를 그리는 것은 먹는 행위에 집중하기 위함이 아니라 입을 뭉개고자 하는 까닭이며, 이는 곧 붓과 매체를 밀어서 화면을 지우는 기법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이페로의 작업들은 대체로 배경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 없이, 여백으로 호흡하는 캔버스 위로 마른 스펀지처럼 물이 스며든 듯한 색채가 얹어진다. 밑그림의 용도로 쓰이는 파스텔은 조형적으로 가벼운 무게의 자유로움을 부여하며, 여기에 젯소를 가미한 붓이 작가의 손이 오가는 대로 민첩하게 매체를 올린다. 그런데 작가가 (수용성인) 아크릴 물감을 주로 사용한 이유에서인지, 빠른 쾌감을 지닌 붓이 바람처럼 캔버스를 노닐며 형상을 밀어내면, 이를 통해 반복된 붓질의 흔적은 마침내 뭇 감정들로 얽힌 맹목의 욕구라는 안개를 걷어내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이 작업은 작가와 관객의 마음을 헹구어내는 과정인 셈이다. 온전한 형상을 무너뜨리는 도중에 우연과 필연이 도모한 결과로 인해 획이 요동치며 점들을 떨구는 전율, 그러한 찰나에 욕망이 비워지면서 발하는 엑스터시는 또 어떠한가.

 

한편 대상을 3차원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생애의 본질을 가시화하려는 의도는 화면 저 밑의 근원에서부터 작품을 지지대처럼 구획하는 캔버스에서도 엿볼 수 있다. 특히 종이 작업에서 작가는 한지를 콜라주하여 캔버스에 이어 붙임으로써, 면들이 서로 겹치고 포개지도록 만든다. 그러면 레이어로 인해 화면의 깊이감과 에너지가 배가하는 동시에, 중첩된 면이 질감의 차이를 연출하면서 관객이 문지르고 뭉개는 붓의 자취에 한층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페로가 고단하게 지어 올린 형체는 지우기의 일환인 이러한 절차를 거쳐 생의 본능적인 욕망을 증발시키고, 삶의 이치를 탐색할 수 있는 매혹적인 가능성으로 다만 호흡하고 있다.


# 삶의 지평

 

긴 공백기를 넘은 이페로 작가가 그림을 일종의 수행으로 삼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아득히 느껴졌던 생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이 일련의 작업들은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이제는 진솔하게 발언할 때가 되었다는, 작가 스스로의 발자취와도 맞닿아 있다. 환희와 절망을 모두 음미하고서야 삶의 영원한 지평이 이페로에게 속할 준비가 되었고, 지난 작업의 행적을 돌이켜본 그는 구태의연한 기법이나 감각을 표현하는 일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기로 결심함으로써 드디어 깨우침을 그릴 채비를 갖춘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피안 (彼岸)으로 가는 이 여정을 맹랑한 신비주의나 좁힐 수 없는 까마득한 거리로 나타내기보다, 역설적이고 해학적인 기호를 사용하여 감상자에게 즉각 스파크를 일으킨다. 이를테면 무소유를 지향하는 부처의 입에 찬란한 보석을 물리거나, 가장 순수한 어린이가 강렬한 식욕을 드러내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상식에 역으로 대응하는 이페로의 작업들은 이렇듯 반짝임을 사뭇 들이켜며 관객을 밝음에 전염시키면서도, 살아 있는 것들은 다 그렇다는 미심쩍은 실상으로 우리를 표류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작업을 매개로 녹록지 않은 깨달음의 세계에 조금씩 다가갈 때 감지되는 마음의 떨림은 형상화할 수 없었던 것을 가까이, 이를 통해 응축된 기억을 영원하게 만든다. 작가와 우리가 거쳐 온 배회의 맨 마지막, 이곳 도피안의 언덕 너머에는 그제야 베일을 벗고 순수한 형상으로 보존된 섭리가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