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EXHIBITION
대리석 속에 떠오르는 벌거벗은 얼굴을
The Naked Face rising out of the Marble
김정인, 임창곤, 호상근
Kim Jungin, Lim Changkon, Ho Sangun
2024 / 09 / 19 ~ 2024 / 10 / 19
대리석 속에 떠오르는 벌거벗은 얼굴을
라흰갤러리 조은영 큐레이터
본 전시 《대리석 속에 떠오르는 벌거벗은 얼굴을》은 회로가 닫힌 세계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쌓고 갇히며 가라앉기를 무디게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으로부터 단초를 찾는다. 이 회로에 틈새를 만들어 잠재적인 일들이 세포 분열을 하듯 현존하게 할 방법이란 어쩌면 ‘와해가 진입이 되고, 완성이 시작의 입구가 된다’고 말하는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맥락에서 전시는 높이 쌓아 올려진 모종의 체계와 형식, 혹은 스스로의 시선으로부터의 ‘비켜섬’을 통해 날마다 새로운 것을 건설하고 세계와 대면하게 된다는 어떤 시에서 기획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그것은 프랑스의 현대 시인 본느프와 (Yves Bonnefoy)의 「미완성이 절정이다」로, 여기서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대리석 속에 떠오르는 벌거벗은 얼굴을 파괴할 것”이라는 구절이다.1) 본 글은 조각가의 작업 과정을 예시함으로써 예술이 무엇인가를 드러내 보인다. 조각가라면 마땅히 대리석에 숨은 얼굴을 찾아 빚는 데에 몰두해야 할 테지만, 본느프와는 이들이 영감과 상상, 추구하는 바 등을 허물고 삼킨 후에 그 위에 새로운 것을 건설하도록 다소간 혹독하게 권면하는 것이다. 한번 토해낼 것을 삼키고 그것을 제압하며, 그러한 바탕을 토대로 작업을 일으킬 때, 작품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틀림없이 더 견고해지는 까닭이다.
전시는 이처럼 형성과 해산의 도정을 형식으로 삼는 세 작가의 작업을 조명하고자 기획되었다. 김정인과 임창곤, 호상근의 작업에서 그들이 부수고 제압하여 이내 새로이 창조하는 것은 기억의 조각들이나 회화의 형식, 또는 일상의 이면에 내재된 이질적인 순간들이다. 전시는 어떠한 지점으로의 경도를 목표로 삼기보다는 오히려 운집으로부터 비켜서는 이들의 작업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어떠한 방법을 통해 난맥의 가능성에, 미미하거나 잘 감지되지 않는 것들의 생성과 산출에 관심을 표명하는지 살펴본다.
# 김정인 : 교란
김정인은 타성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것들, 이를테면 그간 그의 시야에서 비켜나 있었던 것들이나, 혹은 이와 반대로 너무나 익숙했던 대상들을 유심히 더듬어 보는 행위로부터 작업의 열쇠를 얻는다. 그는 이러한 경험과 기억의 조각들을 픽셀 (그리드)의 형태로 화면에 붙들어 보는데, 주목할 만 한 점은 작가가 이 과정을 구체화하면서 화면을 오히려 모호함에 가깝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말인즉 김정인은 의미와 인과의 길을 향하던 그의 ‘대리석 속에 떠오르는 벌거벗은 얼굴’, 곧 기억의 단편들을 픽셀로 형상화하고, 희뿌연 형상과 픽셀의 연막이 모호하게 산개된 화면으로 보는 이를 교란하게 만듦으로써 이해의 시간이 지연되도록 의도하고 있다. 김정인이 이와 같은 교란을 시도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이 세계에 드리워진 모든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힘의 그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함이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우리와 같은 일반 관객들이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생산하려는 의지를 (그러한 틈을 타서) 재정비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회화의 형식을 빌린 김정인의 이러한 고투는 2015년부터 단계적으로 발전해왔다. 특히 (각각의 데시벨을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을 선택하여 관계망을 형성했던 2021~23년의 작업들과 비교했을 때, 근작들이 지니는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기억을 되짚고 허물며 상상하기를 반복한 끝에 화면이 보다 모호하고 자유롭게 구성되었다는 것에 있다. 그것은 비단 픽셀과 희끄무레한 형상에 빚진 결과는 아니다. 이처럼 화면이 가감 없이 자유로워지는 데에는 면을 잇는 선이나 붓질, 색채 등 보다 복잡한 요소들이 기여하는 까닭이다. 가령 당초의 계획을 무너뜨리거나 덧붙이는 ‘무계획적’인 붓질과 대상을 뭉개고 섞는 기법, 느린 호흡으로 쌓이는 유화의 성질은 화면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예상을 배반하며 이해를 저지한다. 기억이 발광하는 색조에 힘입어 뚜렷하게 구체화될 듯하면서도, 이를 저지하는 무채색의 물감에 의해 다시금 모호한 대상으로 흩어지는 현상도 관객을 화면 앞으로 끈질기게 붙잡는 요인이다. 김정인은 이렇듯 분분하고 모호한 회화로 교란의 방식을 꾀하고, 개별 존재들을 덮치는 강압적인 모든 것에 의구심을 제출하고자 그러한 회화의 모호성을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스펙터클에 점유당할 위기에 빠진 사유와 감각의 힘을 구출해내고 있다.
# 임창곤 : 발굴
임창곤의 작업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그로테스크는 피가 천천히 고르게 순환하는 신체의 내부와 우리 몸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지속적으로 세포 분열을 거듭하며 온갖 탄생을 가능케 하는 어떤 모태에 대한 예감과 그것이 일으키는 경이로운 근원적 자극을 눈으로 바라보고 피부로 감각하면서, 그러한 소용돌이 안으로 피할 수 없이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본 전시에서 임창곤은 그가 좇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생명과 신체, 장기 등이 내뿜는 생동감과 그것들의 내부에 머물러 있는 비가시적인 감각을 <결정체, sequoiadendron>와 <떨어져 나온 몸조각> 연작으로 선보이고 있다. <결정체>는 작가가 구작을 제작하고 남은 자투리들을 분리한 후에 (생명의 기원인) ‘세계수’의 의미를 담아 재조합한 작업이며, <떨어져 나온 몸조각>은 신체와 장기, 식물 등의 이미지가 뒤섞인 모노타입 프린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작업들에서 주목할 것은 작은 세계를 캐내는 듯한 물리적인 작업 과정과 재료 및 색채를 다루는 방식이다. 피와 진액, 붉은 암석과 마그마, 팽창하고 뒤틀리는 장기와 고목의 뿌리를 상상하며 이 형상들을 물감에 섞는 행위는 주름과 같은 물성을 파급하는데, 정확히 알 수 없는 이 주름을 여는 과정은 선명한 진입이자 붕괴이며 강렬한 ‘발굴’이 되는 까닭이다.
임창곤은 이렇듯 나무에 구멍을 뚫거나 망치를 내리치고, 혹은 신체를 순간적으로 떠올리면서 물감으로 그의 움직임과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작가는 솟구쳤다가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거듭하는 이러한 형식적인 시도를 축적한 끝에, 그가 발굴한 주름에 근육과 살의 감각을 붙여 그것이 어떠한 물리적 실체가 되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임창곤이 상상했던 신체는 그 자신의 몸을 통해 형체를 입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와 같은 형체는 입에서 항문으로 이어지는 몸 안의 통로를 (마치 동굴처럼) 촉각화, 공간화, 시각화하여 비가시적인 신체 내부를 감각적인 실체로 탐구하도록 이끈다. 내부로부터의 생명력을 내뿜는 노랗고 붉은 색조와, 몸 안의 통로 곳곳에 색의 전이와 농도의 변화를 실핏줄처럼 안착케 하는 오일의 운용 또한 장대하게 출렁이는 몸속의 통로로부터 새로운 주름들을 변화무쌍하게 길어 올리는 요소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을 흙냄새와 어우러진 나무의 응축된 생명력과 결합하는 임창곤의 작업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맥락으로 신체의 감각을 체험케 한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그가 형체를 부여해낸 몸 안의 실체와 소통하며, 종내에는 그러한 형체가 점점 폭을 넓히며 공간화된, 생동하는 세계의 한 가운데에 서 있기를 추구하고 있다.
# 호상근 : 이질화
호상근의 회화는 손으로 두 눈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지루한 시간의 갈피를 넘기면서 바깥의 풍경을 살피는 데에 성가심이 없고, 연극의 한 장면처럼 증발되기 쉬운 사건의 편린일지라도 그것이 이미지로서 어떤 내용을 발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과연 호상근에게 회화는 곧 기록에 다름 아니다. 가령 그는 타인의 이야기라는 서사의 골격에 자신의 시야를 덧대어 모두의, 각자의 개인사에 들어앉는 그림을 제작하는 ‘호상근재현소’ 프로젝트를 2012년부터 이어오고 있는데, 이는 작가가 견지하는, 기억을 스며들게 하는 기록으로서 회화가 지닌 가치를 잘 드러낸다. 그런데 이전까지는 주로 발걸음을 잡던 것들, 특히 사랑스럽지만 짓궂고, 웃기지만 슬픈 대상들을 다루던 호상근은 팬데믹을 기점으로 타지에서의 격리를 경험하게 되면서 작업에 다소의 변화를 주게 되었다. 예컨대 이 무렵부터 그는 대상을 한층 사실적으로 묘사하거나 그럼으로써 관객이 화면의 흐름에 잘 합류할 수 있게 했는데, 특히 본 전시에서는 그러한 시도가 도회의 배경음을 뒤로한 채 낯선 영역에서 도외시된 이미지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작가는 잃어버리거나 버려지고, 세월에 매몰된 물건 등 일상의 하나로 무심히 잊히기 쉬운 것들이 무엇을 출력하는지 주의를 기울이고, 자신의 이방 (異邦)이라는 공기를 감지하며 태연자약하게 머물러 있는 대상들로부터 내밀한 중얼거림을 포착하는 것이다.
하지만 호상근의 작업에 등장하는, 길거리와 눈과 물속에, 나뭇가지에 불시착한 이 대상들은 이러한 배경에 습기처럼 마냥 가라앉지 않는다. 그것들은 굳어짐이 없이 현재하기에 여념이 없고, 불현듯 다른 맥락으로 전환하거나 다른 상황으로 이질화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 까닭이다. 아마도 이는 작자 자신이 외지를 경험하는 입장에서 눈앞의 풍경을 사소한 부분까지 새로이 발견하고 향유할 수 있었다는 배경에서 기인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상을 향한 호상근의 애착과 복합적인 감정이 관객 한 사람 한 사람과 사적으로 깊게 연대를 맺는 연유는 (‘호상근재현소’에서처럼) 작가가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견문과 삶의 조각들을 간직하려는 의지로 하루의 궤적을 정밀하게 탐사한 데에 있을 터이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에 편재하는 낯선 세계의 공기와 그가 본 현상, 상대방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화면에 한데 모이는 과정에서 단선적인 해석으로 정련되기보다는, 매번 다층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드러난다. 또한 건식 재료를 주로 사용하는 호상근은 주변의 환경에 맞춰 매체에 변화를 주는데, 특히 덩어리감을 주는 연필과 채색을 위한 색연필, 흐릿함과 톤을 조절하는 붓을 고루 활용하는 기법은 이상과 같은 회화의 기록을 화면에 한층 섬세하게 불러 모은다. 그렇다면 호상근의 ‘대리석 속에 떠오르는 벌거벗은 얼굴’은 내가 본 것과 네가 본 것 사이에 둘러싸인, 노상 다른 체험과 관점의 구심이 되는 지점에서 자유롭게 부풀어 오르며, 잠재적이고 개연적인 이미지의 생성을 감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 파괴하고 파괴하고, 그리고 또 파괴해야만 했다. 구원은 그 대가로만 이루어진다. 대리석 속에 떠오르는 벌거벗은 얼굴을 파괴할 것. 완성이란 입구이므로 완성을 사랑할 것, 하지만 알게 되면 곧 그것을 부정할 것이며, 죽게 되면 곧 그것을 잊어버릴 것. 미완성이 최고다. 이브 본느프와, 「미완성이 최고다 L'imperfection est la cime」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