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탐색
신혜림, 지근욱, 홍성준
Shin Healim / Ji Keunwook / Hong Seongjoon
2022 / 05 / 26 - 2022 / 07 / 09
심연의 탐색
라흰갤러리 큐레이터 조은영
이 순간 당신의 머릿속에 연극 무대가 펼쳐져 있다고 가정해보라. 빠르게 전개되는 미디어 매체와 달리, 배우의 긴 호흡만으로 완성되는 연극은 연기자의 언어와 몸동작, 표정을 통해 삶의 전면을 비추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소위 ‘명배우’라면 반드시 대사와 억양, 행동 하나하나의 표현 기제를 달리하여 말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작가와 미술 작품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작품을 조형 언어로 삼아 그의 생애와 세계를 표현하므로,1) 이 조형 언어를 부각할 수 있는 의미 구조들을 거듭 탐색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간혹 혹자는 미술 작품에 고귀한 진리나 참신한 이상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집착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상기하였듯 미술이 특정한 조형 형식의 구성으로서 외부 세계와 경험을 나타내기 위한 작가의 ‘전언’임을 참작한다면,2) 관객은 작가가 어떠한 조형 어법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쉽게 헤아릴 수 있고, 작품을 통해 그들의 체험은 훨씬 깊숙한 곳을 파고들게 된다. 현대에 이르러 각양의 형태와 양상을 지닌 작품들이 무시로 등장하고 있지만,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과연 무엇이 (미술을 소통 수단으로 보는) 이 전언보다 더 근원적이고 필요할 것인가.
한편 이처럼 작품을 일종의 발언으로 이해할 때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언어가 형식과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한다는 사실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모든 미술 작품은 매체와 색, 형태, 질감 등의 조형 요소들을 배합한 형식을 그릇으로 삼아, 여기에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는다. 물론 미적 대상의 형식와 내용 관계는 역사와 예술 유형의 방면에서 부단히 변화를 거듭해왔으나,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양자는 서로 지렛대 작용을 하며 화답을 주고받게 되기 마련이다.3)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오늘의 미술도 형식과 내용이 서로의 가능성과 한계에 영향을 주며 상호 작용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다만 작금의 미술 현장에서는 새로운 조형성과 개성적인 내용을 추구한다는 명목 아래, 주제 의식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작품의 가치를 합리화하거나, 형식의 틀을 넘어서는 단계에 머물러버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곤 한다.4)
본 전시 《심연의 탐색》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작품의 독자적인 의미 구조를 실험하며 삶의 체험을 새로운 형태로 재창조하려는 세 명의 작가를 조명한다. 이들은 익숙하고 간단한 조형 요소와 매체 등을 (보이는 것), 가없는 지고의 노력을 다해 겹겹이 올림으로써 (반복), 종국에는 존재의 표면을 돌파해 심연에 가까운 것 (내용)의 공기를 마신다. 여기서 세 작가가 다가가려는 심연이란 삶의 잔향일수도 있고, 우주의 속삭임 또는 낱낱이 포착한 회화의 구역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은 감상을 위한 특별한 지식과 교양을 요구하지 않는다. 순수하고 또렷한 흐름으로 짜인 조형 언어가 완벽의 경지에 달함으로써, 형식이 곧 작품의 의미로 오롯이 승화하는 까닭이다. 그럼으로써 《심연의 탐색》은 미 (美)의 가치를 벗어난 맥락에서 작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작가들의 발언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다름 아닌 그들의 조형 어법을 통해 귀담아 들어보기를 권하는 것이다.
# 사물의 틈새로 부푸는 시간의 지층 - 신혜림
만일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는 남녀 예술가들의 시각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면, 나는 이 간극이 ‘일상성’을 대하는 태도에서 연유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제언하는 바이다. 여성의 구역을 구분하는 일이 고리타분한 인습이 된 지 오래임에도, 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여전히 살림의 영역에서 작업의 열정을 발산하며 ‘사소한 것들’의 가치를 나날이 측량하고 있지 않은가. 공예가 신혜림은 바로 이처럼 일상의 작은 것들에게 헌신과 애정을 쏟는 자의 표본과도 같은 작가다. 그런데 그가 세월에 매몰되어가던 대상의 영혼을 구석구석 정화하여 창조해낸 결과물은 작고 보잘것없거나 억지로 고안해 낸 세계가 아니다. 신혜림의 작업은 사물에 새로운 울림을 부여함으로써 잊힌 매력이, 형체와 질서와 아름다움이 새로운 윤무로 어우러지는 까닭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작가는 주어진 일상의 소재들을 날마다 예민한 손동작으로 파고들며, 사물과 대화를 나누는 이 공예적인 과정을 통해 그것의 촘촘한 틈새를 살피게 되었다. 턱없이 부족한 시간과 좁은 활동 반경이 제약을 가할수록 신혜림의 시선은 가죽, 실, 종이 등 쉽게 손에 닿는 사물에 더욱 적극적으로 향하였고, 오랜 기간 축적된 재료들이 작가에게 놀림당하고 애정을 받으며 차곡차곡 작업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합일은 대단한 기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유희와 정성으로 건설된다. 정교한 마감이나 실용보다는 나만의 무언가를 찾기 위해 수수께끼를 풀 듯이 즐기고,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 신혜림의 지론인 셈이다.
특히 그는 매체가 지닌 특유의 단점을 극복하여 사물의 질서를 다시 찾고자 정진한다. 금속 선을 바탕으로 하는 구조물에 스테인리스 선을 쌓고자 방습과 접착제, 코팅과 씨름했던 작업은 의도하여 사물을 정성껏 챙긴 끝에 물성을 재탄생시킨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인지 신혜림의 작업에는 실 하나에도 수많은 목소리가 굽이치고 두터운 내면의 굳은살이 드러난다. 하지만 선형 (線形)을 이루며 극진하게 재료를 쌓은 그의 작품에서 조물주의 총애가 송두리째 기운 듯한 이 정성보다 빛나는 것은, 압축된 사물의 틈새로부터 부푸는 시간의 지층이다. 요컨대 신혜림의 작업은 측면을 만들기 위해 압축을 거듭하는 과정에 관한 것이며, 결과를 나타내는 정면이 아닌 과정 중심의 측면을 보여줌으로써 힘있게 압축된 시간의 작용을 풀어낸다. 이 시간의 지층으로부터 작가가 지나온 삶과 인연의 끈이 자라고, 나직한 선의 짜임이 되어 공간을 맴도는 것이다. 신혜림의 작업은 이렇듯 풍성하게 집적된 선들의 합창으로 사물의 울림을 고양할 뿐만 아니라, 공예성이나 기법을 초월한, 시간을 공들인 ‘삶의 태도’를 나직한 여음으로 이어나가고 있다.
# 우주의 의지와 화해하는 길 - 지근욱
개념과 정신성을 나타내는 데에 ‘선’이 가장 적절한 요소라는 사실은 미술의 오랜 역사를 관통하는 진리이다. 비전 (vision)처럼 투명한 성질을 지닌 선은 이처럼 감각에 호소하지 않고서도 추상적인 내용을 충실히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다. 형체 없는 무한을 붙들고자 하는 작가 지근욱이 우주의 심연을 표현하기 위해 이 선들의 건축을 끊임없이 세우고 마감하는 것은 그러한 점에서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작가는 캔버스를 묽은 젯소로 칠하고 올라가 누르며 잔뜩 괴롭힌 다음, 명쾌하게 수려한 수천 수백의 선들을 힘찬 에너지로 분출해낸다. 이전까지 그는 방사형의 직선을 주로 사용해왔지만, 이번 전시를 포함한 근래의 작업에서는 운동성을 지닌 곡선을 점차 가미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지근욱은 반복되고 휘어지고 변화하는 선들을 통해 마치 카오스의 공허처럼 만든 캔버스 위로 큰 파도를 일으킨다.
따라서 지근욱의 작업은 선들을 어떻게 모을 것인지에 관한 조형감을 자양분으로 삼는다. 여기서 작업의 기틀은 물론 중앙배치를 바탕으로 하는 안정감이다. 작가는 선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겹겹이 쌓기 위해 형태를 시뮬레이션으로 구상할 뿐만 아니라, 곡선 모양의 자를 만들어 시각적인 질서 아래 선들을 중첩해나간다. 그런데 지근욱은 선과 도구의 모듈로써 지성의 권역을 움켜쥐는가 싶더니, 선들의 잔가지 위로 약간의 공간을 찾아내어 느닷없이 관객의 시야를 잡아당기고 달구기 시작한다. 선의 강도를 늦췄다 당겼다 하며 시선을 즉흥적이고 우연하게 분산시키는 것이다. 그의 작업이 이처럼 때로는 파토스 (pathos)로 출렁이고 때로는 태초의 세계처럼 침묵할 수 있는 근거는 우선 색연필의 효과에 있다. 색연필은 빛의 스펙트럼에 따라 체계화된 색상을 매개로 작품의 물리적인 주제에 객관성의 지표가 되어주는 한편, 보풀처럼 아른거리는 텍스처가 작업에 수반되는 무수한 ‘차이’들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매 순간 다른 강도나 작가의 태도와 같은 차이가 색연필을 통해 뭉개짐 없이 단계적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그러나 지근욱의 작품은 우주의 의지와 화해하려는 이 작업에 그가 ‘반복 행위’로써 자신을 빈틈없이 헌신하고 소멸케 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저력을 발휘한다. 색연필로 강도를 달리하며 선을 반복해서 화면에 남기는 모든 과정의 구심에는 미지를 향해 끝없이 발돋움하는 작가의 행위가 자리하는 것이다. 이 반복 행위로 인해 그의 작품은 (동일 요소가 되풀이되지만 작가의 수행성이 배제된) 옵티컬 아트와 공통분모를 지니면서도 뚜렷이 구별되며, 차이가 반복을 혹은 반복이 차이를 낳는 과정성이 잠재력을 발휘하며 무한히 반향하게 된다. 그리고 작가는 재능과 기교를 넘어서는, 정신과 수행 측면의 강건함으로 마침내 감상자를 중력으로부터 사뿐해진 영역으로 데려간다. 그의 선들이 카오스를 뚫듯 출렁이며 캔버스 바깥으로 안착하려는 곳을 따라 가보라. 선이 모두 사그라진 후에도 우주가 잔잔히 관객을 감싸는 순간, 비로소 열린 세계가 눈앞에 창조된다.
# 회화에 부치는 프롤로그 - 홍성준
홍성준 작가의 작업 세계를 논함에 있어 ‘기억의 현미경으로 담은 시선’을 언급하는 것보다 더 적절한 서두는 없는즉, 과연 그의 작품 전반은 카메라 렌즈로 포착한 낱낱의 순간에서 발단하였다. 시선을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대상을 촬영하는 관찰을 토대로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홍성준은 렌즈를 통하여 여과된 세상에는 자신이 부재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자리를 찾고자 했던 작가는 일체의 내러티브를 그림에서 배제한 채, 캔버스를 채워 나가는 과정을 근원에서부터 규명하기로 했다. 그 결과 홍성준은 젯소를 칠하고 쌓으며 말리기를 반복한 끝에, 남겨진 캔버스로부터 고개를 내미는 자의식을 끌어올렸다. 그 자신은 부단히 ‘캔버스를 어루만지는 주체’이며, (가령 물감을 쌓는 작업을 1부터 10까지 구분한다면) 매체를 한 층씩 평면 위에 얹어 나가는 태도를 시각화함으로써, 하나의 겹 (레이어)을 축적할 때마다 파생되는 의미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홍성준의 《레이어스 Layers》 연작은 바로 이 ‘층위’를 둘러싼 추측과 탐색으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서 작가의 이지적 판단이 가장 먼저 도달한 곳은 ‘말이 필요 없는 그림이란 무엇인가’라는, 회화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였다. 주지하다시피 일루전 (illusion) 회화는 평면 위에 3차원의 대상을 재현한 것으로, ‘평면성’을 본원적인 개념으로 삼는다. 홍성준이 섬세하게 감지한 레이어의 첫 뉘앙스 또한 이와 같은 평면성과 환영이라는 회화의 발아점이다. 예컨대 그의 작품은 하늘 등의 풍경을 재현하여 시선이 오가는 창을 제시하면서도, 종국에는 이 형상이 평면에 씌운 물감 껍데기이자 일루전임을 인지하게 한다. 그러면 관객은 캔버스를 물들이는 색조 하나하나를 찾아내다가, 어느새 구름 조각을 야단치는 빛깔 사이로 꿈쩍 않고 머무는 매체에 탐닉하게 된다. 기실 매체의 물성은 홍성준의 작업에서 겹과 겹 사이를 지탱하는 기둥과 같다. 작가는 점토처럼 어루만지는 작업에 아크릴을, 붓 자국을 흐릿하게 만드는 데에는 에어브러쉬를 사용하는 등 재료와 일체가 되어 겹을 집적하는 태도를 화면에 오롯이 남기고 있다. 작업의 또 다른 층을 이루는 종이에도 재미를 준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그는 한지를 배합한 연작들을 선보이는데, 캔버스에 겹쳐진 한지의 찌꺼기와 양감, 그리드 형태는 자연이 주는 감각적인 희열을 더할 뿐만 아니라, 날이 선 듯한 인상으로 인해 레이어를 거듭 포개는 작가의 태도가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한편 물성의 감각을 놓치지 않으며 유희하는 겹겹의 레이어에 접근하다보면, 관객을 공명케 하는 또 다른 뉘앙스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망망한 구름과 윤슬이 그려진 캔버스 뒤편으로 작가가 장밋빛 어스름 마냥 또 다른 빛깔과 공기를 재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멸하듯 여광처럼 남은 레이어들은 그가 뒤집어 보여주는 세상을 통해 기억과 감정, 내면을 곱씹게 하며 마지막 승화를 완성한다. 조금 덧붙이자면 이것은 카메라로 담은 여러 시간의 궤적을 하나의 작품 안에 응집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처럼 스토리의 전개 없이 회화의 가장 간소한 요소와 개념만으로, 가지런히 세워 놓은 레이어의 짜임만으로 정서적 체험을 달구어내는 홍성준의 작업은 그야말로 회화에 부치는 프롤로그이자 범례와도 같다. 겹으로써 회화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작가는 그래서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레이어의 틈새에 남겨둔다.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이른 이 프롤로그에서, 홍성준의 층위의 망은 또 다른 의미를 직조하고자 오감 앞에 미풍처럼 너울거린다.
* 각주
[1] 박일호, 『미술은 언어다』 (서울: 문예마당, 2002), 112.
[2] 허버트 리드, 『예술의 의미』, 임산 역 (서울: 에코리브르, 2006), 24.
[3] 장파,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유중하 역 (파주: 푸른숲, 1999), 55, 298.
[4] 박일호, 『미술은 언어다』,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