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가 방 안에 있다
Elephant in the Room
Charlotte Perriand, Jean Prouvé, Willy Guhl 外
2021 / 1 / 15 - 2021 / 2 / 28
살림 밖으로 나온 가구들, 살림의 새 척도를 제시하다.
라흰갤러리 큐레이터 조은영
# 방 안의 네 귀퉁이, 세상을 품다.
적극적인 자기 PR이 기본 덕목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스스로를 영리하게 팔아야 하는 시대이다 보니, 학위와 경력은 물론 의상이나 가방과 같은 소품들까지도 ‘자기 브랜딩’에 활용된다. 그러나 효과적인 아웃풋은 내가, 나만의 사유가 중심에 있을 때 비로소 싹틀 수 있다. 문제는 내 철학을 어디에서 발견하느냐에 있다. 2021년 1월 라흰은 <코끼리가 방 안에 있다>는, 다소 위트 섞인 전시를 통해 이 의문의 단초를 ‘집’에서 찾고자 한다.
요컨대 집은 곧 사람이다. 집만큼이나 나의 시간과 모든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공간을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팬데믹 시대를 걸어가는 요즈음, 내 철학의 면면이 집으로부터 묻어나온다는 관념은 더욱 큰 공감대를 얻는다. 일상에 ‘오프’ 스위치를 켜게 만든 작금의 새로운 질서가 집의 개념을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연일 이어지는 무료한 일상 속에서도 여하간 ‘집콕’을 피하기는 어렵기에, 방 안의 네 귀퉁이를 마치 코끼리처럼 묵직하게 차지한 우리는 대면하고 싶지 않았던 ‘코로나 블루’라는 위기를 이제 정면으로 부딪쳐 보기로 한다. 코로나 시대의 난관이 방 안을 차지한 아주 큰 코끼리처럼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면, 주어진 공간에서의 시간을 이 코끼리가 호젓하게 즐기면 되지 않을까. 이와 같은 발상의 전환이 바로 이번 전시 <코끼리가 방 안에 있다>에서 이루어진다.
#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빈티지 가구의 품격
관건은 집 안에 자리한 ‘무엇’이 과연 우리의 내면세계를 비추는가에 있다. 해답은 집에서 사용하는 온갖 물건들, 즉 가구이다. 가구를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집안 살림에 쓰이는 ‘기구 (具)’이지만, 가구의 조형성과 그 기저를 이루는 문화적 맥락이 연구되면서 이제는 가구가 작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라흰이 조명하고자 하는 것은 1940~1970년대에 제작된, 이른바 미드 센추리 시대의 빈티지 가구이다.
사실 빈티지 가구는 매끈하게 화려한 멋과는 거리가 멀다. 구석구석 살펴보면 자잘한 흠집과 색이 바랜 흔적도 역력하다. 그런데도 이처럼 손때 가득한 빈티지 가구들은 늘 영감의 원천이 되며, 소위 ‘고급 더듬이’들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빈티지 가구의 가치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다는 희소성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고, 컬렉터의 철학과 맥을 같이하는 조형미나 낡아온 역사가 풍기는 격조, 그리고 주변 인테리어와 이루는 전반적인 조화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오래된 와인을 이르기도 하는 ‘빈티지’는 단순한 중고를 지칭하지 않는다. 빈티지는 특정 시대의 양식을 대표하는 아이템이며, 수십 년의 역사와 콘텐츠가 깃들어 있는 세기의 아이콘이다. 그만큼 빈티지를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내공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빈티지 가구는 타인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취향과 사유가 공간 곳곳에 공명하도록 만든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개화한 미드 센추리 시대의 빈티지 양식은 전후 물자와 자원이 한정된 조건에서 창의적인 디자인에 더욱 주력한 까닭에, 오늘날까지도 끝없는 영감과 창조성의 원류가 되고 있다.
이 시기 빈티지 가구들의 특징으로는 첫째, 매일의 삶에 쓰일 수 있는 실용적인 기능을 꼽을 수 있다. 예컨대 페리앙 (Charlotte Perriand, 1903~1999)은 자신의 가구가 ‘우아한 오브제’를 넘어 근대 생활의 즐거움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에 통합되기를 바랐는데, 그가 늘 강조했던 "l'art de vivre (일상의 예술)" 개념은 가구가 지닌 본래의 기능을 부각한다. 둘째는 민주주의에 토대를 둔 디자인, 쉽게 말하면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다. 산업화 시대의 배경 덕분에 미드 센추리의 디자이너들은 자연스럽게 예술과 산업의 융합을 도모하였고, 여기에 명료한 미학과 합리적인 제조 공정을 더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간소한 형태는 미드 센추리 디자인의 세 번째 특징이다. 이 단순미는 구조-재료-기능이 그야말로 삼합을 이룰 수 있도록 뒷받침해준다. 그리고 단순미를 통해 마지막 특징인 ‘유기적’ 영향 관계가 완성된다. 가령 “공간을 지배하게 하지 마라. 가구의 형식과 기능이 전체적인 맥락에서 주변과 통합되게 하라”고 했던 클린트 (Kaare Klint, 1888-1954)의 견해는 이 시대 가구들의 기저를 이루는 ‘유기성’의 철학을 방증한다.
# 독보적인 특색을 넘어, 위로의 힘까지.
미드 센추리 가구들의 위와 같은 특징들은 가구가 자리한 공간을 ‘나만의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탈바꿈시킨다. 빈티지에 깃들어 있는 역사와 손때는 남들이 다 하는 천편일률적인 인테리어가 아니라, 컬렉터 개개인이 지향하는 이상향과 철학이 집안 곳곳에 배어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빈티지 가구를 활용한 인테리어가 시대를 초월한 클래식으로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라흰갤러리의 곳곳에 위치한 빈티지 가구들을 보면, 과연 이 아이템들이 ‘집에서 쓰는 세간’으로서의 살림을 초월하여, ‘한집안을 이루며 살아가는’ 살림의 새로운 척도가 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빈티지 가구가 제시하는 살림의 척도는 격변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반가운 힌트를 준다. 존재 가치가 위협받는 시대에서 위기를 타개할 돌파구는 ‘본질 (essence)’에 있고, 빈티지 가구는 다른 양식의 가구들과 뒤섞여도 항상 존재의 균형을 유지하며 조화로우면서도 독특한 공간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컬렉터는 여기에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런데 빈티지 가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패러다임의 대전환 속에서 상생의 가치가 더욱 커지는 요즈음, 우리 ‘공생하는 인간 (homo symbious)’들은 주변 환경과 융화된 빈티지 가구로부터 위안을 얻고, 삶의 방식을 근원적으로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이름만큼이나 하얀 도화지처럼 작품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비추어내는 라흰에서, 나만의 스토리를 가구에 담고 또 가구가 주는 치유의 힘을 실감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