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선 개인전

2020 / 6 / 3 - 2020 / 6 / 17

전시 평론

음성원 (도시건축전문작가)





1970~80년대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주택의 전성시대였다. 당시에는 붉은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벽을 만들고, 그 위에 판상의 슬라브로 층을 올리고, 경사진 박공 지붕을 얹는 식으로 집을 지었다. 그런 주택은 ‘블란서형 주택’이라 불렸다. 서울 연희동과 연남동에는 이런 형태의 주택이 여전히 즐비하다.


사실 연희동과 연남동은 ‘오래된 동네’였다. 여기서 말하는 ‘오래된’은 아파트로 개발된 동네와 비교했을 때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이런 주택이 전부 사라졌고, 또 사라지고 있다. 불도저로 밀어 버리고 현대 생활인들이 좋아하는 아파트 등을 지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는 ‘개발’의 관점에서 보자면, 연희·연남동은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듯한 오래된 동네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연희·연남동을 바라보는 시선은 정반대다. 이곳을 두고 “최신의 트렌드가 담겨 있는 젊음의 거리”라고 이야기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특히나 젊은 밀리니 얼(1980년생부터 2000년생)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오래된 동네'와 ‘최신 트렌드의 거리'라는, 이 극단적인 관점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은 최근 볼 수 있는 건물의 재생 건축 기법에서 비롯되었다. 재생 건축은 기존의 재료를 최대한 살리고 새 재료를 덧대어 건물을 새롭게 바꿔내는 기술이다. 붉은 벽돌은 이 재생 건축 과정에서 살아남게 되는 핵심 건축재료다.


흙을 구워 만든 붉은 벽돌은 시간을 머금을수록 아름다워지는 건축재료 중 하나다. 벽돌이라는 물성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은 시간을 담아내는 능력이다. 벽돌은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동시에 숙성된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들어진 벽체는 울퉁불퉁 서투른 듯하면서도 원래 예정되어 있는 곳으로, 꼭 가야 할 방향으로 길을 가는 듯한 느낌의 선을 그려낸다. 매정하게 컴퓨터로 그린 도면과 달리 연필로 그린 그림 같은 느낌을 주는 건축 재료가 바로 벽돌이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각진 표면보다, 이런 재료가 훨씬 더 정감이 간다.


그런데, 재미난 점은 보통의 경우 이 같은 벽돌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힘들다는 점이다. 섀시나 유리처럼 오래될수록 지저분하게 느껴지는 건축재료 때문이다. 벽돌은 어떤 재료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느낌이 극단적으로 달라진다. 깨끗한 섀시와 유리, 노출 콘크리트와 같은 현대적 물성의 건축재료는 벽돌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꺼내놓는다. 40~50년의 역사를 머금고 있던 건축물은 이제야 비로소 그간 간직했던 이야기를 뿜어내고 있다. 


양화선 작가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했다. 그의 이야기는 바로 이 건축물에서 시작된다.


양화선 작가는 영국 런던에서 9년간 유학 생활을 하며 급변하는 도시의 모습을 캔버스 안에 담아왔다. 도시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유는 그의 런던살이 속에서 부정적으로 점철된 기억 때문이다. 그가 런던에 머물 당시, 하필 런던 최대의 재개발 사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양화선 작가에 따르면 “특별한 시설 없이도 작업을 할 수 있고 알아서 공간을 꾸려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작가”들은 런던 한가운데에 있지만 허름해 임대료가 낮은 동네에 모여 살았다. 하지만 이 재개발의 유령이 한 발자국씩 발걸음을 옮기며 이들의 거주지를 점령할 때마다 떠날 수밖에 없었다. 런던에서의 ‘지배적인 경험'이 바로 이런 형태의 ‘내몰림’이었던 것이다. 양화선 작가가 도시 풍경을 담는 이유는 바로 이런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이전 작품들 중 하나에는, 크레인 수 십 대가 무심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 무표정한 기계의 모습은 그저 경제 논리에 따라 엔진이 돌아가고, 긴 시간의 기억이 담긴 건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허물고, 공장에서 제조된 철근을 옮겨 심는 작업을 한다. 힘없는 작가들은 눈물을 머금으며 밖으로, 밖으로 몰려나갔다. 이런 일을 겪은 작가들 한 명 한 명의 인생과 사연은 양화선 작가의 기억에 고스란히 박혀 있다. 그는 “예술가들은 점점 동쪽으로, 북쪽으로, 또는 남쪽으로 옮겨 다니며 계속해서 힙한 동네를 만들었고, 또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메뚜기 뛰듯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난 뒤, 한국에 돌아와 처음 목격한 동네는, 여전히 옛 모습을 담고 있으면서도 세련된 동네인 연희·연남동이었다. 양화선 작가는 자칫 시대에 뒤떨어진 오래된 동네로 치부될 뻔한 동네가 재생 건축이라는 ‘붓 터치’ 하나로 최신의 동네로 변신하는 ‘마법’을 목격했다. 그래서 연희·연남동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따뜻하다. 양화선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벽돌과 같은 오래된 재료와 최근 등장한 건축재료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건물들에 초점을 맞춰 캔버스에 담았다.


양화선 작가가 발견한 연희·연남은 런던과 대조적인 공간이다. 불도저가 밀어내지 못한 공간, 차갑게 늘어서 있는 대형 크레인을 보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다. 더욱이 그의 작업실은 연희·연남동과 같은 마포구 안에 있지만, 이미 런던에서처럼 재개발이 대대적으로 이뤄져 오피스텔 빌딩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곳이다. 이전의 모습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또 다른 런던에서 그는 캔버스 위에 아크릴을 덧칠했다. 작업실에서 홍제천을 따라 연희·연남을 찾아 다닌 양 작가가 처음 만난 동네는 연남동의 휴먼타운이었다. 기존 건물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주민 편의시설과 보안시설 등의 인프라를 확충하는 ‘휴먼타운' 방식의 재생이 최초로 적용된 동네는, 런던에서 재개발을 경험한 양화선 작가에게 독특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던 풍경이었다. 이 동네에서 활동 중인 쿠움파트너스 등의 건축회사는 여기에 더해 옛 건축물을 그대로 남기는 재생 건축 기법을 유행시켰다. 그렇게 건물 하나하나가 아름답게 원래 있던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연희·연남의 모습은 런던에서 차갑게 식어버린 양화선 작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데 충분한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전시가 열리는 ‘라흰갤러리’라는 장소 역시도 이런 맥락과 이어진다. 옛 건축재료와 새 재료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건물 외관을 눈동자에 새기고 전시장에 들어서면 양화선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재생 건축물의 세계가 펼쳐진다. 얼핏 차가워 보이는 건물의 시멘트 벽면은 파랑과 청록의 이미지가 겹쳐 있는 양화선 작가의 그림이 얹어지면서 따뜻하게 되살아난다. 양화선 작가 그림에 담긴 색채는 피카소가 ‘청색시대(Blue period)’에 그렸던 ‘자화상'(1901)의 색깔과 닮았다. 피카소가 그랬듯 양화선 작가는 런던에서 겪은 상실의 시대를 통과하며 자기 자신과 동료 작가들에 대한 연민을 표현한 듯하다. 색채심리연구가인 스에나가 타미오가 저서 ‘색채 심리'에 쓴 표현을 인용해 그의 그림을 평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상징적인 파란 세계를 통과함으로써 생사를 초월한 경지에 다다른다. 그래서 기분에 따라 한껏 우울해 보일 수도 있는 양화선 작가의 파란색은 상실을 넘어선 재생을 발견하게 만든다.”


다만, 세련되면서도 따뜻한, 양가적인 감정을 품어내는 이 건물들이 한국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위상은 건물이 가지고 있는 속성과 마찬가지로 양면적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재생 건축으로 동네가 뜨면, 주거지가 상업 용도로 쓰이게 됨에 따라 그곳에 원래 살던 이들이 떠나는 경우가 생기고, 동네의 인기에 편승해 높아진 임대료 탓에 임차인 역시 쫓겨 나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현상을 두고 한국 사회는 지난 2014년부터 ‘젠트리피케이션’이라 부르며 부정적으로 소개해 왔다.


반면 양화선 작가가 경험한 런던의 재개발과 비교하면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거꾸로 뒤집으면 도시재생이 된다. 젠트리피케이션과 도시재생, 둘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도시재생은 원래의 용도가 다한 동네에서 새로운 용도를 찾아내고, 그 용도에 맞게 건물과 동네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일이다. 그 의미 그대로, 도시재생은 필연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을 불러일으킨다. 가만히 담겨 있던 물이 다시 흐르게 되면 원래 모습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변화는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다만 사람들을 내쫓는 속도와 파괴력이라는 측면에서 재생 건축과 도시재생은 분명 크레인이 지어 올리는 재개발에 비해 훨씬 더 나은 결과를 끄집어 낼 수 있다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불도저로 동네를 밀어내지 않으니 골목길도 살아남게 된다. 그리하여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다시 찾아와 그 길 한 모퉁이에서 과거에 경험했던 소소한 기억을 꺼내볼 수도 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보며 양화선 작가의 그림을 감상해 보면 연희·연남동의 풍경에 담겨 있는 각자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