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준 개인전

2019 / 12 / 6 - 2019 / 12 / 31

전시 서문

라흰 큐레이터 박정원


캔버스라는 프레임

홍성준 작가의 작품은 회화의 핵심 요소인 캔버스를 큰 ‘프레임’으로 상정하고 시작된다. 이 프레임에는 다양한 이미지가 픽셀처럼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아크릴과 유화 물감을 사용하여 회화라는 매체에 대한 요소를 충분히 충족시킨다. 단, 여기에는 회화를 회화답게 하는 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기 좋게 전복시키려는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다. 그 이유는 홍성준 작가는 ‘회화’의 정체성을 도구적 회화로 넘어서려는 작가의 숨은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기존의 회화에 대한 개념을 넘어서며 모순을 꽤한다. 

작가의 매끈한 캔버스 즉, 프레임은 마치 보호색처럼 시선을 이끈다. 여기에는 물성과 관련된 마티에르나 붓질의 흔적 등 작가만의 시그니처가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을 보는 이들이 가까이 와서 들여다보게 만드는 행위에는 프레임/캔버스 표면이 어떤 대상과 비슷해 보이는 표피를 가지고 있다는 무의식적인 이유가 행동 기작의 원인이 된다. 작가에겐 물성은 표피이다. 표피를 입고 있는 캔버스/프레임. 


스킨 컬렉터

대리석과 비슷해 보이는 캔버스 표면은 농도를 동일하게 설정한 아크릴 물감을 마블링 기법으로 한 번에 찍어내고 물감이 마르기 전에 이리저리 흔들어 완성한 것이다. 홍성준 작가의 캔버스/프레임 표피의 주된 재료는 아크릴 물감이며, 이 재료의 패턴을 수집한다. 젤(gel) 성질을 지닌 아크릴 물감을 여러 색을 완전히 섞지 않은 상태에서 유리판에 칠하고 말린 후에 스킨처럼 떼어내어 수집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블링 기법을 활용한 바탕 표면 또한 작은 판에 찍어내어 다양한 패턴을 만들어 모은다.

그리고 홍성준 작가는 프레임/캔버스 속 또 다른 프레임들을 설정하여 이미지를 선별하여 그리는데, 이 이미지 역시 직접 촬영한 것이다. 약 10년간 수집한 작가만의 ‘IMG' 아카이브는 그동안 작가의 시선, 관심, 기억, 감성 등을 사로잡은 직관의 이미지 집합이다. 작가의 주관적인 정체성이 담겨있는 이 이미지들은 다시 회화의 프레임에 선별하여 소환하면서 시간성과 공간성을 상실한다. 그리고 객관적인 조건 속 익명의 대상으로 포진됨으로써 홍성준 작가의 회화는 역설적인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만들어 진다. 


페인팅 프로토콜

홍성준 작가의 ‘IMG' 아카이브는 회화에서 컬러 혹은 이미지 등 온전히 시각적인 조건에서 선별된다. 결국 작가는 이 이미지에 캔버스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씌워주는 것이다. 이것이 주관적이고 사적인 시점에서 출발한 ‘IMG' 아카이브가 객관적으로 카테고리화 되고 참조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회화라는 프레임의 표피적 요소로 구성된다. 마침내 작품은 전시되며 공공의 이미지가 된다. 작가에게 이미지는 ‘표피’, ‘껍데기’ 등과 같은 가볍고도 어떤 정체성을 규정하기엔 얄팍한 속임수라고도 생각될 수 있다. 그리고 형태가 다른 ‘레이어(layer)’를 보는 이들이 즉각 알아볼 수 있게끔 설정하면서 오늘날 취해지고 버려지고 누군가를 현혹하는 이미지들을 각성시킨다. 작가는 이렇게 회화에 회화의 방식으로 의문을 제기하면서 ‘보다(see)'라는 행위의 연쇄성이 만든 회화의 역사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와 동시에 회화의 물성을 온전히 이해하면서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작가의 태도 또한 엿볼 수 있다. 

사실 새로운 ‘프레임’에 대한 역사는 이어져 오고 있다. 

17세기 괴테는 『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1809)에서 소설의 정체성을 상대로 새로운 프레임을 실험했다. 그리고 뒤샹은 죽기 전 20년간 누구도 알지 못하게 매진한〈에탕 도네(Étant donnés)〉(1946~1966)를 통해 개념미술의 창시자답게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했다. 성(sex)을 철학의 장르로 이해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 젠더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 이전에는 푸코, 들뢰즈 등의 철학자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소모적인 시도라고 보았을 것이다. 이것을 행하는 주체자마저도 그랬을지 모른다. 

아마도 홍성준 작가는 지금 ‘프레임’을 새롭게 보려는 시도는 회화만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음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다고 확신한다. 



작업노트 

작가의 말





나는 주로 ‘보는 행위’와 ‘보임을 당하는 상황’이라는 다소 모순적인 일상적 상황을 재현하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하는 익살스럽고 모순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재구성하여 편평한 캔버스에 표현한 것이다. 실제 보는 이(관객)가 내 작품을 마주하며 모순된 상황을 반복적으로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자 하였으며, 이를 통해 보거나 보인다는 행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화면 속에 표현한 공간은 디지털카메라를 통해 수집한 것이며 이는 고유한 나만의 시선을 통해 재해석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나는 주로 전시장(갤러리 혹은 박물관) 공간을 추출하는데, 평면 안에 펼쳐진 공간은 단순한 그림의 배경으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내가 개별 작품에 따라 설정하는 여백의 크기에 의해 권위적이고 압도적인 인상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 첫 번째 단계로 나는 공간을 드로잉으로 표현해 보고, 그것과 어울리는 사물 혹은 인물을 그 위에 콜라주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금 배치한다. 이에 더해 어쩌면 화면 속 공간에 실재했던 것 같은 텍스트를 하나의 기호로 사용하면서 각 이미지들 간의 혼재 상황을 조성한다. 특히 2011년부터 2017년 사이에 제작한 작품들은 물감의 물성을 한껏 드러내는 양각의 기법을 활용하여 그것이 오직 빛(조명)에 의해 은밀하게 혹은 확연하게 보이게 되는 텍스트를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비교적 의미를 명확하게 지칭하는 텍스트라는 매체의 성격을 은유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나는 이른바 찰나와 같은 순간을 캔버스 위에 ‘언어의 기호성’을 빌려 표현하고자 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언어의 기호성’은 나의 그림 안에서 조셉 코수스가 주장한 “언어의 형상성”과 같은 의미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코수스에 따르면 텍스트를 시각적으로 인식한다면, 이는 일반적인 시각 이미지보다 더 심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이와 같은 “언어의 형상성” 개념을 바탕으로 평면의 회화 안에서 텍스트를 사람들에게 읽힘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무엇으로 변환시키고자 하였다. 이로써 나는 상호 간 의사소통을 위해 존재하는 언어가 언제나 이해라는 지점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서로의 몰이해를 증폭시킬 수도 있다는 반전의 가능성 역시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었다. 


또한 작업을 위해 본인이 수행하는 이미지 수집의 행위는 자의적으로 카메라 렌즈를 멈추고 셔터를 누르는 행위 그 자체로 주관성을 띠겠지만, 그것이 수집된 이후 공간 이미지가 어떤 데이터로 변환되면서 동시에 객관성을 가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나는 그 배율을 근경보다는 원경에 맞추고자 했는데, 그 이유는 멀리있는 사람이나 사물, 풍경 등이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좀 더 제3자의 시점에서 대상을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참조 이미지가 아닌 직접 찍은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은 혹시라도 모를 다른 작업과의 이미지 오버랩을 피하기 위함이며, 나의 경험들을 간접적인 경험(Online)이 아닌 직접적인 경험(Offline)으로서 인식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최근 2018년부터의 작품들은 디지털 카메라에 담긴 파일을 저장 매체에 전송할 때 생성되는 IMG(파일번호)를 작품 제목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내가 직접 찍은 디지털 사진을 기반으로 하여 제작한 회화가 지니게 되는 ‘(시각)데이터로서의 이미지’라는 의미에 집중한 결과이다. 작품 제작에 주요한 재료 역할을 하는 수많은 사진들은 대부분 기억하기 위해 저장해 두었던 것이며, 이것은 곧 작업의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 자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이때 사진 이미지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맥락은 흐릿해지고, 작품과 조우하는 그 순간 맥락을 창출한다. 


결론적으로 나의 전작들은 보거나, 보이는 주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메시지를 시사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으며, 2018년도부터 시작한 근작들은 그간 쌓아온 IMG 파일 형식을 작업으로 끌어들이며 스크린 이미지의 의미와 그 맥락에 관한 고민을 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